2024년4월15일 월새 쭉정이와 알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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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510(마태복음 3장 11-12절)
제목:쭉정이와 알곡
본문:마태복음 3장 11-12절
 나는 너희로 회개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런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라 하는 것은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세례입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주었다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주관으로 잘못된 걸음을 걸은 거기에서 회개시키기 위한 회개케 하기 위해서 준 세례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베푸시는 세례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성령은 우리 자체를 완전히 죽여 변화시키는 역사를 말하고 불로 세례를 준다고 하는 것은 모든 탈 것을 다 태우므로 뜨거워질 것은 뜨거워지게 하신다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신약 교회에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공로로 이루어질 구원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12절에는 손의 키를 들고 자기의 가장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뿐만 아니라 이것은 계속 정결케 하는 역사를 하십니다 정결케 하는  이 역사를 두고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어서 알곡은 하나님의 곳간에 드리고 하나님의 보호 안에 들어가고 쭉정이는 세상에 버려서 멸하게 하신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알곡이 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손에 다 키를 들고 자기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해서 알곡은 모아 드리고 쭉정이는 불에 태운다 하는 이 말씀은 하나의 비유에 그런 말씀입니다 알곡이라 한 것은 알맹이와 알맹이를 싸고 있는 껍데기요 둘이 붙었을 때 그것을 두고 알곡이라 말하고 쌀을 두고 알곡이라 말하는 것 아닙니다. 껍데기와 알맹이가 붙어 있을 때에 알곡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쭉쟁이는 무엇이 쭉정이인가 쭉정이는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는 쭉정입니다 알곡은  알맹이를 내포하고 있는 껍데기 그것이 알곡인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이 무엇인가 여기에 알맹이는 무엇이 알맹이 인가? 우리들의 알맹이는 세 가지가 우리의 알맹이입니다. 우리의 알맹이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대속의 공로로 인한 성령의 은혜와 대속으로 인한 진리의 은혜  이 셋은 알맹입니다.  이 알맹이를 싸고 있는 그 껍데기는 우리 구속 받은 성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쭉정이는 무엇인가? 쭉정이는 우리 성도들 외형은 꼭 같은데 속에 알맹이가 없는 이것이 쭉정이입니다 알맹이가 없다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이 없다는 것이요. 영감이 없다는 것이요 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껍데기 외형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쭉정이는 불에 던져 사르고 알맹이는 알곡은 곳간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두 사람의 모든 생활이 꼭 같은데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하나는 데려감을 당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을 여기에 맞추어 보면 쭉정이는 버려둠을 당하고 알곡은 데려감을 당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쭉정이란 말은 껍데기는 있지만은 알맹이가 없는 것이 쭉정이요 알곡은 껍데기 속에 알맹이가 있기 때문에 알곡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자가 어떤 영감을 가지고 역사하든지 어떤 지능을 가지고 역사하든지 어떤 수단 방법을 가지고 역사하든지 기독자 안에 알맹이가 없으면 쭉정이요 알맹이가 있으면 알곡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자는 예수님의 대속에 공로와 영감과 진리 이 셋이 그 속에 있어서 이 셋으로 인하여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생활하는 것이 되어지면 알곡이 되어집니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나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살아야 되겠다 하고 영감으로 살려고 진리로 살려고 이런 일을 저런 일을 이런 속에서 저런 속에서 살면 알곡이 되지만은 이것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세상 지식을 따라 이 세상에 이런저런 욕망을 따라서 아무리 많이 끌어 모아도 지위가 올라가도 아무리 형통해도 그것은 쭉정이가 되고 맙니다. 쭉정이가 되면 그것은 다 불에 태워 버립니다.
 그러므로 사람이야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던지 간에 자기와 모든 일을 할 때에 세 가지 능력으로 한 것은 하늘나라 들어갑니다 자신이 주님의 대속에 공로를 깨달아서  이 대속을 입고 살려고  이 행위를 하고 이런 걸음을 걸어가는 사람이면 대 속에 공로를 입고 삶으로 자기에게 영감이 온 영감 따라 살고 대속의 공로를 입고 삶으로 깨달은 진리대로 살려고 이런 환경 저런 환경 속에서 이런저런 걸어가면 걸음을 걸어가면 그 기능은 다 알곡이 되어 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대속에 공로를 잊어버리고 일만 하는 것으로는 그 기능이 영생하는 기능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할 때는 예수님의 대속에 공로로 인하여 하려고 하고 예수님의 대속에 공로로 우리에게 영감 시켜 주시는 영감 따라 깨달아 안 진리를 따라 살려고 애를 쓸 때 알곡이 되어 집니다. 그 행위는 영생하는 기능을 이룰 수 있는 그런 행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모든 걸음 걸음에서 알곡을 만드느냐 쭉정이 만드느냐 하는 이것이 결정 됩니다 내가 하루 살아도 쭉정이 만든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불탈 기능만 만든 것이요 내가 사는 모든 행위가 대속으로 인한 행위요 대속으로 인해서 내게 영감이 온 그 영감 따라 살고 진리에 따라 산 것이 되어야 영생하는 기능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런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문을 열어 달라는 것은 중생된 영과 연결된  이 세 가지 지극히 큰 능력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우리 마음을 주장하려고 그렇게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문을 두드려서 마음속에 와서 마음을 통치하는 것이 되어지면 이제 주님은 나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고 나는 주님으로 인하여 이 큰 구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본 구원인 영의 중생은 우리 주관 행위는 하나도 없이 순전히 객관에 은혜로만 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우리가 하나도 상관할 것이 없지만은 우리가 이룰 건설 구원 행위 구원 성화 구원은 심신의 기능 구원은 우리가 나는 기본구원을 받은 자기인 줄 알고 나는 사죄를 입은 사람이라 칭의를 입은 사람이라 화친을 입은 사람이라 하는 것을 알고 죄를 멸하는 걸음을 걸어가고 의를 이루는 걸음을 걸어가고 하나님과 하나되어 살기 위해서 이 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 영감과 진리가 내게 와서 인도할 때 그 인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것은 영감과 진리가 내게 와서 내 마음속에 역사하려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세 가지 대속을 항상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55절에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은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가 생각하고 감각하고 깨닫고 대속에 충격을 받는 그것이 우리에게 참된 양식이 된단 말입니다 이 세 가지 대속으로 인한 힘이라야 우리가 영생을 이룰 수 있지 이것이 아니면 영생을 이루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 현실에서 세 가지 대속을 생각하고 세 가지 대속으로 인하여 움직여지는 그런 자기가 될 때에  이 건설구원을 바로 이루어 가는 자기가 됩니다. 그것이 영원히 주님의 것으로 움직일 수 있는 심신의 기능을 마련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시다가 자유 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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