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10월18일 수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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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30(마태복음 5장 1-4절)
제목: 심령이 가난한 자
본문:마태복음 5장 1-4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잘못하면 껍데기로 외식으로 이렇게 살기가 쉽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외식으로 사는 것인고 하면, 사실이야 어떻게 되었던지 간에 사람의 눈과 귀와 입을 상대해 가지고 사는 이런 사람이 되기가 쉽습니다. 그 사람 속이야 어찌 되었든지 간에 그 내게 대한 것은 내용이나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다른 사람이 보지 않으면 됐다. 생각하고 아무리 악한 일이 있어도 보지 않았으면 됐으니까.
안심이라 듣지 않았으니까. 안심이라 또 듣고 보았다. 할지라도 말만 안하면 별 문제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아주 껍데기로 살기 쉽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이 듣던지 못 들었던지 봤던지 못 봤던지 말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속에 사실이 있습니다.
그 속에 사실이 있는데, 사실에서 이것을 수정할려고 세상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저 남의 눈가림으로 입막음으로 귀가림으로 이런 세계에서 이만하면 됐다. 하고 사는 그런 외식의 사람이 되기가 쉽습니다. 아무리 사람의 눈을 피하고 귀를 피하고 입을 피했다. 할지라도 그 안에 사실은 사실대로 있습니다. 사실이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이렇게 하면 된다.
하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되면 그 사람에게는 안심하고 산다는 것이 마치 끓는 물 옆에 어린아이가 돌아다니는 것과 꼭 같습니다. 언제 뜨거운 물에 빠져서 그 아이가 상할런지 모릅니다. 언제 자기에게 화가 갑자기 닥칠런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런 속에 살지 않아야 되겠고 또 사람이 아무리 눈을 피하고 귀를 피하고 입을 가루고 피했다.
할지라도 사실은 사실이 있으니 사실을 우리는 잡고 잘못된 것이 없도록 할려고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든지 안 보던지 그 사실이 잘못됨이 없도록 하려고 눈가림으로 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생활을 깊숙히 살펴봐서  사실에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은 나를 몰라서 나를 칭찬한다.
할지라도 내가 아는 대로는 사실이 이렇게 되어 있지 않느냐 다른 사람이 나를 몰라서 입을 닫고 있을지라도 내게는 이런 사실이 있지 않느냐 이 사실에서 우리가 사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고 이 사실에서 살면 그만 족한 줄로 여길 것이 아니라 이런 사실이 있고 없는 내가 그렇게 행동하고 안 한 또 세상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합법적이요  일반 세상에서는 다 그렇게 살고 있는 것들이지만은 세상 사람들이 다 하고 있는데, 나도 그와 같이 살았는데 누가 봐도 그걸 나쁘다고 잘못했다고 정죄할 만한 그런 일이 없지 않으냐 이렇게 자기와 세상 일반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여론적으로 정죄받지 안 할 만한 그런 일이 되지 않았느냐 하고 안심하고 사는 여기에 머무는 사람 되기가 싶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신앙 양심으로 생각해 볼 때는 아무래도 그런 일은 그렇게 되어지고 있지만은 양심상 그런 꺼리끼는 그런 일이 속에 있습니다. 일은 됐지마는 양심으로 생각해 볼 때는 그 일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세상 국법에 걸릴 것 없고 다 용인되는 일이고 일반 사회에서도 걸릴 것이 없고 다른 사람 보기에도 걸릴 것이 없다.
할지라도 자기 양심상 생각해 볼 때는 그 일이 아무래도 거지뿌리가 있고 이렇게 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하다 해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끄트머리는 일은 이렇게 밋밋하게 잘됐다. 할지라도 자기 양심이 불쾌해서 눈에 보이는 일이 좀 지장이 있고 그게 잘못되어도 아무래도 내가 양심에 가책을 받으니까.
못 견디겠다고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말을 하지 아니하고 알지 못하지만은 양심의 가책을 받으니까.
마음이 도무지 불쾌해서 못 견디고 마음이 활발하지 못하다 해서 사람이 차차차차 그 모든 일에 손해를 봐도 자기 양심대로 바로 일을 했으면은 다른 사람들은 껍데기만 보지 속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양심대로 그 일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욕먹는 일이 되고, 이해 못할 일이 되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이야 이렇게 말하든지 저렇게 말하든지 아무래도 내가 양심이 편한 대로 양심이 꺼리끼기 때문에 이 일은 할 수 없다고 해서 양심에 꺼리끼지 않는 이런 걸음을 걷는 사람으로 우리는 성장되어 나가야 합니다.
일반 모든 사람이면 다른 사람의 이목에 사회법에 다른 사람의 귀에 꺼리낌이 없다고 안심하고 가서는 되지 아니하고 또 자기 마음에 이만하면 됐다.
하고 그렇게 가지를 못하고 마음이 깨운치 못하기 때문에 마음의 평강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신앙 양심을 찾아가는 그것이 신앙 양심으로 사는 기독자인 것입니다.
자기 신앙 양심에 가책이 없어야 되지 신앙 양심에 가책되는 그런 일은 할 수가 없다고 해서 신구약 성경 말씀을 가지고 이렇게 살펴보고 세상법에서는 정죄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은 의뢰히 할 수 있는 그런 일이지만은 내가 성경을 보고 예수 믿는 사람으로 성경대로 생각해 볼 때는 이것은 잘못됐다. 성경대로 되지 못했다.
하는 그런 깨꾸롬한 마음을 가지는 그것이 신앙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신앙 양심으로 모든 것을 다 고치고 수정해서 신앙 양심의 가책이 없다고 신앙 양심의 가책 없이 사는 이런 사람이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만하면 신앙 양심에 가책될 것은 하나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리에서 살면 이만하면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이성 판단을 가지고도 잘못됐다고 삐뚤어졌다고 생각되는 것이 없으니까.
이것은 괜찮다 이렇게 생각하고 사는 것은 신앙 양심으로 사는 사람이지만은 양심에는 하나도 거리낌이 되지 아니하지만은 내가 신구약 성경을 알고 이 진리를 알고 보니까, 그래도 이 이치에는 맞지 않고 이 위치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이 되어지니까.
양심에 꺼리끼지 않아도 진리에 꺼리끼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진리대로 살려고 하는 그 사람이 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진리대로 살아서 신구약 성경 말씀이 보증을 해주니까 성경에 이렇지 않으냐 성경에 이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성구를 가지고 보증할 때에 성경 말씀에 이렇게 했으니까. 성경 말씀대로 됐다. 이렇게 한다.
할지라도 또 내가 하나님 심판 앞에 설 때에 성경에 이렇기 때문에 내가 이 말씀대로 이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지만은 그래도 마음에  허전한 공허함을 가지게 되어집니다. 그러면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모든 생활에서 다른 사람의 눈을 피했고 입을 피했고 귀를 피했다 하더라도 사실이 그대로 있습니다.
사실이 있기 때문에 안심이 되지 아니하고 내가 이 일을 해결해야 되겠다. 하는 사람은 진실로 들어가는 진실의 사람인 것입니다.
사실이야 이 사회에서도 다 인정할 수 있는 일이오 또 이 세상 불법에서도 인정할 수 있는 이런 일이지마는 자기 신앙 양심에 께꼬롬해서 그만 견디지 못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가지고. 이 말씀대로 되도록 해야 되겠다. 하고 성구를 뒷받침 받아서 이렇게 하면 그 마음의 허전함이 조금 해결이 되어집니다.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안심을 가지고 사는 이 사람은 신앙의 사람입니다. 신앙양심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어떤 언행심사의 행동을 할 때에 성경대로 했으니까. 안심하는 그것은 신앙 양심으로 사는 것이 됩니다.
성경으로 이렇게 바로 되었다고 안심을 하는 그것이 신앙 양심으로 사는 사람인데 고린도 전서 4장 3절에 보면,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다른 사람이 나를 내 하는 일을 다 잘됐다. 못됐다.
하는 그런 판단 다른 사람이 잘못됐다고 하면, 내가 고치지만은 다른 모든 사람이 잘했다고 칭찬을 하고 또 내 밑에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잘 됐다. 바로 됐습니다. 옳게 됐습니다. 이렇게 판단하니까 안심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아야 됩니다. 사도바울도 이런 사람이 인정한다고 안심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정한다고 칭찬한다고 잘했다고 노벨상을 받았다고 안심할 수가 없고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옳다 잘했다. 모든 사람들이 인정한다고 해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매우 작은 일로 여긴다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이만하면 됐다고 인정하고 안심하는 내가 되지 않는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 하노니 내가 자책할 것이 없지만은 내가 다른 사람은 나를 모르지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것보다 내가 나를 더 잘 보기 때문에 내 양심을 가지고 나를 비판 평가해서 아무 책망할 것이 없다.
할지라도 내가 깨닫지 못해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한 말씀 같이 내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고 내가 성경적으로 생각해도 잘못된 일이 없고 신앙 양심적으로 생각해봐도 잘못된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으로 안심하지 않는 것이 신앙의 사람 성령의 사람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했으니까. 되지 않느냐 하고 신앙양심으로 비판해 보고 성경을 가지고도 비판에서 문제가 없으니까. 이만하면 됐다.
하지만은 나를 판단 하실 이는 전지전능하신 주님이 판단하시기 때문에 그런 심판의 자리에 나아가기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다고 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그 사람이 영감의 사람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문제를 해결해 갈려고 애를 써 가는 마음을 두고 심령이 가난하다 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여기에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양심 밑에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양심이 있고 양심을 파고 들어가면 영혼이 있고 영혼을 파고 들어가면 심령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으로 사는 거기에는 이런 차이가 여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된다. 하는 것은 성령의 감화로 받아 가지고.
사는 이 걸음을 걷지 못한 여기에 대해서 마음의 번민과 걱정을 가지는 이면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이런 심령의 가난성을 가지는 이 가난성을 가져야 되는 것은 내가 자책할 것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 생각하면서 우리는 주님이 오시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생각하고 자기를 고치고 정리해 갈 수 있는 이런 신앙걸음을 걷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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