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6월24일 토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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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3062460(베드로 전서 3장 20-22절)
제목: 신앙 양심
본문: 베드로 전서 3장 20-22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 겨우 8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냐

 우리가 소원하는 구원은 영원한 것이요. 완전한 것이오 영생의 것이오 불변의 것입니다. 이런 구원을 우리가 이루려고 하는 것인데 이 구원은 인적 요소로는 구원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인적 요소로 어떻게 불변의 것을 만들 수 있으며 유한한 자가 영원한 것을 만들며 불완전 한자가 완전을 만들며 잠깐 있다가 떠날자가 영생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그런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순전히 객관의 능력인 하나님만이 이 구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구원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데,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하나님이 하시는 이 구원이 우리에게 건너오도록 하려고 하면,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이 하나님의 사랑에 신실하심의 역사가 우리에게 건너오는 데는 무엇으로 건너올 수가 있느냐 우리 인간으로서는 그렇게 할 만한 그런 요소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로서는 하나님이 잘해 주실 것이다. 신실하게 해 주실 것이다.
왜냐 그가 선포해 놓으신 약속은 천지는 없어져도 변하지 않는 약속이요. 이 약속을 믿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믿는 것 외에는 다른 초자연의 능력의 역사를 끌어오는 그런 요소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한 것으로 영생의 것으로 불변의 것으로 완전성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아무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해 주실 수 있다. 하는 이것을 믿는 요것뿐입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약속하신 예언의 말씀은 도무지 사람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그런 일이지만은 그 예언의 말씀을 믿고 인생이 순종할 때에 그것이 이루어졌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것이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믿지 않을 때는 믿지 않는 사람은 이 구원이 다 실패가 되었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 노아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 한 그대로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120년을 배를 만들었는데 바닷가에 만들었으면 물이 있으니까. 거기에 필요하지만은 육지에서 배를 만들었습니다. 이러니까 배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120년 후에 홍수로 온 세상이 다 멸망을 시킬 때에 이 배를 만들어서 이 배에서 구원을 얻도록 그렇게 가르쳐 준 그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순종하는 행동에 맞추어서 역사하십니다.
그렇게 역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언한 대로 구원이 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맞추시고 이루시는데 천하에 모든 사람이 다 달라들어서 그런 찬란하고 능한 일을 할려고 해도 하나님이 그 일을 헛되게 만들어 버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지혜를 헛것으로 만들었다 하는 말씀은 인생들은 오늘까지 인간 이치에 딱 맞도록 했지마는 하나님은 인간 이치에 하나도 맞지 않도록 딱 틀어서 해버립니다. 인생들이 일기 예보를 볼 때 내일은 비가 올 것입니다.
하고 딱 맞춰서 했지만은 하나님의 빽틀어버리니까 비가 안 오고 날이 맑고 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도 백틀어서 비가 오게 되고  이런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신이 선포해 놓은 예약을 따라서 하나님은 주권 개별 심리의 하나님이 지극히 작은 것도 주권 개별 승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약속을 선포해 놓으시고 선포하신 약속대로 일이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섭리를 하십니다.
만일 예를 들면, 공중에 집이 지어져라 하면 그른 일이야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 될 일이지만은 공중에 집이 지어질 것을 말씀했기 때문에 믿고 순종을 하면 하나님의 주권 능력으로 공중에 집이 지어지도록 그렇게 하시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주는 데는 무슨 힘이 있어서 우리가 그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하신 말씀대로 믿을 때 믿는 거기에 딱 맞추어서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약하실 말씀을 무시하고 인간 생각대로 하는 것은 인생들이 이치에 맞도록 딱 그렇게 해서 고대로 된 되도록 이렇게 되어 있다. 해도 하나님이 그것이 맞지 않도록 그렇게 섭리를 하시기 때문에 땅에 지혜 있는 자의 지혜를 다 헛 것으로 여기신다고 고린도전서 1장 이하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신 표적 도저히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인데 우리가 믿고 순종하니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나타난 표적을 우리는 평생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하는 말씀대로 주님이 가르쳐 준 말씀을 생각하고 지켜 순종할 수 있는 그런 우리가 되도록 해야 됩니다.
지난 주일에는 양심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양심이 우리에게 어떻게 필요한가 양심을 왜 가져야 되느냐 양심을 길러봐야 하는 이유가 뭐냐 양심 없이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마음이 정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그렇게 말씀을 했거든요. 정결한 마음이라는 것은 깨끗한 마음은 양심을 가리켜서 정결한 마음이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니까 양심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군요.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양심으로만 볼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고 인격 존재입니다. 인격 존재인데 양심은 인격의 눈이라 그렇게 성경에 많이 말씀합니다.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둡고 눈이 밝으면 온몸이 밝은 것처럼 내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전부가 어둡고 내게 있는 빛이 밝으면 모든 것이 밝아진다 그렇게 말씀을 한 그것이 빛을 말하는 것이 양심을 가르쳐서 말하는 것입니다.
양심을 파묻은 사람 양심을 죽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눈을 빼버린 사람입니다. 육체의 눈을 뽑는 것은 그것도 손해가 되지만은 그 손해는 그렇게 많지 아니하지만은 인격의 눈을 뽑으면 그의 일생 동안 사는 모든 생활 생각하고 활동하고 연구하는 전체가 어두워지고 어두워져서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
2장으로 3장까지의 말씀을 보면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것은 육체에 귀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있지만은 귀 있는 자는 들어라 하는 그 귀는 양심을 두고 말합니다. 양심은 인격에 귀가 되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수 있다. 하는 말입니다.
양심을 매장시키지 않고 양심이 있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양심이 장성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양심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형태를 볼 수 있고 양심은 착한 양심은 하나님을 찾아간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서 활동을 하는데 이 직장에 나가서 이 사람을 만나고 이런저런 일을 하는 모든 목적은 어릴 적에는  물질을 얻기 위해서 하고 그 사람이 좀 더 장성해지면 옳은 행위를 하기 위해서 하고 그 사람이 좀 더 장성해지면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성공하는 길은 어떤 길인가 과학적으로 활동을 하는 방법도 있고 또 인간의 원죄와 본죄에 원죄와 본죄대로의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원죄와 범죄대로의 활동을 하는 사람은 활동한 것만큼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람이 자기가 아무리 달콤하게 여겨서 죄를 범하지마는 죄와는 자기가 필연적으로 갈라서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지옥가는 사람들도 죄와는 갈라서서 죄는 원치 않고 하나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래도 자기가 죄가 지혜와 하나가 되어서 결국에 멸망되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과학적으로 딱 맞춰서 하면 안 되겠느냐 하고 과학적으로 하면 물질과 물질의 수입은 되어집니다. 물질과 물질의 화합은 잘 되지만은 물질과 인간의 화합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해도 그것은 성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성공을 무엇으로 할려고 하느냐 제일 성공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양심으로 활동하는 것입니다.
어릴 적에는 돈만 벌면 된다. 하고 이렇게 하지만은 조금 장성한 사람은 여기서 사람 노릇을 바로 해야지 사람으로서 바로 살려고 이렇게 이제 아주 장성한 사람이 되면 많은 사람이 사람 옳다 잘했다. 사람 참 잘 살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는 그 길이 뭐냐 이것을 사람들이 다 원하는데 그걸 얻기 위해서 과학적으로만 할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얻지 못하는 길이오 인간이 자기중심 자기 위주로 하면 얻을 수 있는가 했지만은 모든 사람과 도리어 영원히 원수가 되어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인생이 되지 사람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안 됩니다. 그러면 양심으로 활동하는 것은 양심은 천하에 있는 모든 사람의 양심은 다 하나입니다. 양심은 하나라는 말은 양심의 한 개라는 말이 아니고 양심이라는 것은 꼭 같다 말입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이 세상 지식을 따라서 이런 양심 저런 양심으로 많이 변질되어 있는 양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이 요구나 하는 것은 양심이 원하고 동경하는 것은 꼭 같습니다.
그것은 마치  한 걸음 한걸음 걸어가는 향방이 틀리면 이 사람은 동으로 향해 가고 저 사람은 서를 향해 가서 완전히 목표가 다르지만은 고 걷는 방식이 꼭 같으면 방향이 같으면 한 목표에 다 도달하게 되는 것이요.
그러나 사람의 지식들이 달라서 향방이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향방이 다르지만은 양심은 다 같습니다. 양심으로 사는 것은 자기로서는 이상이 없는 최고로 깨끗한 거 제일 바로 한 고것을 찾아가는 것이 양심입니다. 자기로서는 제일 옳고 깨끗하고 바른 그것을 찾는 것이 양심입니다.
불교도는 불교의 지식대로 제일 온전하고 바르고 참된 것을 찾아가겠다는 것이 불교의 양심이요  유교인은 유교인으로서의 제일 옳고 바른 것을 찾아 가고자 하는 것이 양심이에요. 이슬람교는 이슬람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서 제일 옳고 바른 것을 찾아가려고 하는 것이 이스람교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그 지식대로의 최고의 온전을 향해서 절정을 향하여 찾아가려고 하는 것이 다
똑같습니다. 양심이 변질되어서 그렇지 향방을 향해서 가는 것은 그 지식대로는 최고의 옳은 그것을 향하여 가고 그것을 찾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라도 인간을 점령하려고 하면, 인간에 모든 소유인 물질을 점령하는 것은 사람을 점령하면 물질은 필연적으로 점령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세상에서 어떤 지식을 가졌든지 어떤 양심을 가졌던지 그 사람이 과학적으로 정치적으로 온갖 능력수단 압력으로 유혹으로 기만으로 어떤 종류 안에서의 양심과 동행하는 것이 어떤 종류 안에서의 활동으로 사람을 차지하려고 해도 양심이 양심과 동행하므로 그것을 차지하는 이것이 제일 능률이 크고 수입이 많습니다.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인데도 원수적인 그런 사람이라도 양심대로 행하면 처음 만났지만은 딱 맞게 되어집니다. 양심이 주격되어서 양심으로 살면 그 양심과 하나가 되어서 다 같게 되어져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딱 맞추려고 하면, 연결되어서 할려고 하면, 신앙 양심을 가지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와도 모든 믿는 자의 소원과도 하나가 되어서 이룰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양심을 키울 수 있는 양심을 성장시킬 수 있는 그런 우리가 되어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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