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17일 토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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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3061760(히브리서10장 32-39절)
제목:고난의 큰 싸움
본문:히브리서10장 32-39절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우리가 이렇게 신앙 걸음을 걸어갈려고 하면, 우리에게는 고난의 큰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우리들입니다. 그 이유는 믿지 아니할 때는 악령에게 속하는 그런 우리였습니다.
마귀에게 속해서 이렇게 살던 우리가 이제는 소속을 바꾸어서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어서 우리가 중생되어짐으로 말미암아 이제 성령에게 소속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우리가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상관없이 전적 하나님 은혜로 우리를 불러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성령에 속한 자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자신이 이렇게 구원받은 증거가 무엇인가 중생된 증거는 우리에게 주님의 대속의 공로가 믿어지는 이 역사가 우리에게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잠깐이라도 이렇게 주님의 대속에 대해서 믿어지고 천국 준비하고 싶은 생각이 나지고 또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자기속에 생겨졌다고 하면, 그것은 중생되어진 그런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으면 여기에 대한 관심도 없고 아무런 그런 생각이 나지도 않고 소망을 가지고 사는 그런 것도 없습니다. 이래서 어떤 그런 사람들은 주일학교 때에 이렇게 예수 믿기 시작했다가 그만 타락이 되어서 믿지 않고 일생 그렇게 거다가 마지막 숨을 때 믿는 사람이 되어지는 그런 것도 보게 됩니다.
그게 중생이 되지 않고는 이런 믿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소속이 다릅니다. 완전히 하나님에게 속한 이 사람이 되어졌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런 핍박이 있고 그런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마찰이 생겨질 수밖에 없다. 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또 우리는 중생됨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예수 믿기 전은 세상에 이런저런 소망을 가지고 살았지만은 이래 예수 믿고 난 다음에 나는 하늘나라 갈 수 있는 내가 됐다.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이 소망을 이루려고 하는 이것이 우리 속에 생겨집니다.
아직 어리지만은 거기에 대한 소망이 생겨지고 자기가 좀 장성해져 하면 땅의 소망보다는 하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내 마음을 다 기울이고 사는 이런 자기가 되어집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만 아는 세상 모든 사람이 볼 때는 참 마찰이 되어지고 참 정신없이 사는 사람처럼 보여지게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살지 말라고 권면을 하고 대적이 되어지고 마찰이 될 수밖에 없죠. 또 우리 속에 생명은 이 육의 생명은 점점 죽어가는 생명이고 죽은 생명인데 이게 완전히 죽어가는 생명이죠. 그런데 우리가 중생됨으로 우리 안에 영생하는 새 생명이 이 생기게 되어 좋습니다.
이러니까 이제는 이 생명이 우리의 온몸을 다 점령하고 싶어요. 온몸을 다 통치하는 이 생명이 되려고 이 생명의 역사가 점점 더 강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마찰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과거는 인간 지식을 가지고 살던 그런 우리들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인간 지식을 가지고 이런 우리가 이제 신고약 성경 말씀을 읽게 되고 듣게 되고 이 말씀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이 지식이 우리에게 생겨졌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자연이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고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고 여기에 전날에 빛을 받은 후에 하는 말씀입니다. 그게 빛을 받았다. 하는 말은 우리가 진리를 받았다. 하는 말이요. 영감을 받았다는 말이요.
대속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빛이라 하는 것은 이 세 가지를 빛이라 하겠습니다. 그 이 세 가지가 빛인 것이 이 세 가지가 우리에게 와서는 이 세 가지로 우리에게 왔으니까. 이 세 가지를 나타내는 우리가 되고 또 이 이 세 가지로 사는 이것이 인생으로서 참 바로 사는 것이 되어집니다.
이 세 가지로 사는 것은 인생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졌던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 연결되어졌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 수 있는 그런 우리가 되어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목적하신 대로 정상적인 사람 참 사람이 되어진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빛을 받아서 빛을 나타내는 이것이 우리의 걸어갈 걸음이라 어디든지 진리를 나타내고 영감을 잘 나타내고 대속을 나타내는 이 자기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모든 세상 생활이 되어지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에게 오는 어려움은 환란을 잘 참은 것은 참 잘한 것인데 그 환란을 참은 그것으로 인해서 그 환란을 참았기 때문에 그건 잘한 것이다. 그것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는 것인가?
여기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그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은 내가 원래 인내심이 있고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역사하기 때문에 지극히 크신 하나님이 내게 오셔서 나를 붙듯신 그 표적이다.
나는 그런 인간의 악을 대항할 만한 그런 힘이 없는데 인간의 악을 이길 만한 힘이 없는 나인데 나를 붙들어서 이 신앙이 유지되도록 이렇게 하는 하나님의 나를 도운 것이다.
하나님이 니에게 와서 내가 실수하지 않도록 하나님을 믿는 이 믿음이 계속되어지도록 이렇게 해 주신 증거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 그 증거라 그래 우리가 이것을 기억하고 자기에게 그의 과거 처음 예수 믿으면서 이 신앙걸음을 걸어가려고 하니까 이 사람이 이 방해하고 사람이 방해하고 그래 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 못 산다 온갖 방해로 다 하는데도 어떻게 내가 그렇게 방해를 이기고 계속할 수 있었을까?
게 그렇게 이긴 것은 주님이 내 안에 와서 성령님이 내 속에 오셨고 진리가 내 속에 오셨고 주님의 대속이 내 속에 와서 나를 붙들고 역사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겼단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오신 증거 증거로 나타난 그런 일이라 그래서 내가 과거에 이렇게 나를 붙들고 역사한 이것은 하나님이 내게 오셨다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왔다 나는 완전히 주님의 것된 나였다.
이것을 잊어버리지 말고 이것을 굳게 잡고 있어라 말입니다. 그러면은 여기에서 우리는 어려움이 와도 계속할 수 있고 여기에서 우리는 큰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이런 결실을 이루게 되어집니다.
그래서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해라 우리가 많은 비방을 받고 환란을 당하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될 또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그런 우리가 되어졌다 하는 여기의 말씀은 이런 비방을 듣고 너 잘못한다. 너가 삐뚤어졌다 너 생각이 비뚤어졌다 그렇게 살아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하냐?
너가 좀 정신이 잘못된 것 아니냐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는 소속이 다르고 우리는 새 생명을 받았고 또 우리는 이제 완전히 주님의 것되어서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우리가 되어 있고, 신구약 성경 말씀을 읽고 보니까, 이보다 더 좋은 옳은 그런 길이 없기 때문에 이 길 걸어가는데 이건 받지 않는 사람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렇게 나를  비방합니다. 우리는 비방할 때에 비방하는 사람을 대적하지 말아야 됩니다.  비방할 때 비방이 있으면 내가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비방을 하는데 자기들이 볼 때에 너가 지금 잘못됐다. 생각이 잘못됐다. 그렇게 하는데 내 생각이 잘못됐느냐 과연 내가 생각을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하면, 즉시 고치면 됩니다.
그래 고치면 그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있을 때 에 정죄받을 것을 미리 깨달아서 고치게 해 주니까 그렇게 비방하는 그 사람은 내 선지자요 선생이요. 나를 구원하는 자가 되기 때문에 나를 보고 비망하고 욕을 해도 우리는 그에게 대해서 도리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네게 잘못이 없는데 아무리 봐도 잘못이 없는데 비방하면 내가 뭐도 잘못해 내 잘못이 없는데 왜 나를 욕하나 이렇게 대항할 것이 아니그만 참아라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참고 있으면 그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어진다 하나님을 기쁘시하는 일이 된다.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지식대로 사는 그것을 틀렸다고 정죄하고 그길을 걸어가지 못하게 했는데도 이길이 옳다 이 길을 걸어가야 된다.
하고 믿고 순종하는 것을 계속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고 하나님에게 하나님께는 기쁨이 되었죠. 또 그렇게 걸어가는 그 사람을 보고 그렇게 핍박하던 사람이 구원을 이루게 되어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그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정한다고 많은 매를 맞고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됐습니다.
그렇게 매를 맞아도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이래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참고 맞았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로 인해서 그 두드린 사람이 그날 밤에 이 사도 바울의 걸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고 그날 밤에 세워진 교회가 빌립보 교회라 말합니다. 또 이렇게 참고 견디는 데서 사람을 구원하는 이 구원의 역사가 여기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만이 아니고 오늘 우리들도 핍박이 올 때 참고 견디니까 거기에서 그렇게 핍박하던 사람이 구원을 이루게 되는 이것을 볼 수 있는데, 과거에 백 목사님은 일본 순사가 그렇게 대개 고통을 주고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은 그래도 핍박하는 일을 했다가 해방되고 나니까 사람이 벌벌 떨면서 용서해 달라고 그럴 때 예 걱정하지 마라고 도로 과자를 사주었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아마 일본으로 돌아가서 예수 믿지 않았을까? 그래 얘기를 합니다. 대부분 핍박 할 때 하고 지내가니까 그때 구원할 자를 구원하는 이 구원의 역사가 여기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 주님도 당신을 주님은 창조주요 주권자요 만왕의 왕인데 주님을 보고 침을 뱉고 가시 면류관을 세우고 채찍으로 때리고 조롱하고 그러면 참기가 굉장히 어렵게 않습니까?
우리 사람도 자기 지위가 어느 정도 있는데, 잘 못했다고 마구 하면, 그만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자살하고 마는 걸 봅니다.  얼마나 거기서 저런 실력 있는 분이 자살을 할까 그렇게 느끼게 되죠. 그렇게 주님은 창조주신데도 당신이 참고 견딤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는 이 구원이 성공이 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환란이 올 때는 이렇게 이 환란이 바로 우리 자신을 깨끗게 하는 것이 되고, 또 주님에게 기쁨이 되어지고 또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이런 일이 되기 때문에 이 환란을 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환란이라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다 어렵고 힘든 일이기 때문에 그걸 어떻게 견디겠느냐 우리 힘으로는 안됩니다.
주님이 내게 오셔서 성령과 진리로 역사하기 때문에 그 힘으로 우리는 이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조롱하고 또 구경거리가 되어집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었다 어떻게 되는가 보자 이렇게 우리를 구경하는 그런 구경거리가 되었었다 이래 말씀을 했습니다.
그것을 두고 마태복음 5장에는 산 위에 세운 동네라 등경 위에 둔 불이라  우리를 높이 들어서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뭘 보느냐 우리가 잘못이 있으면 잘못이 있는 것만큼 그만큼 그 비 많이 나오고 어려움이 오고 이렇게 오는 것이 나타나고 또 우리가 하는 그런 잘못이 없을 때 모든 사람에게 참 사람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 옳은 길이라 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이렇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자기는 신앙걸음을 걸어도 이런 걸음을 걷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런 환란이 없는 사람입니다. 환란이 없지만, 그런 환란을 당한 사람을 볼 때에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그 사람을 참 동정하고 사람은 잘못이 없는데 참 이렇게 믿음으로 살려고 하니까 어려움을 당했구나 그 내가 도와줘야 되겠다.  과거에 그런 일이 있습니다.
백 목사님을 공산주의자라고 몰아서 죽일려고 집을 뺑 둘러싸서 불을 피워놓고 기다리면서 집에 오면 잡아 죽인다고 기다리고 있는 그럴 때에 사모님은 그만  그래 하는 가운데서 놀래서 유산을 하게 됐다.
그래 그렇게 됐을 때 그 유산한 아이를 초상을 쳐야 될 건데 누가 그것을 해 줄 수 있느냐 아무도 집에 가면 같이 공산주의라는 이름을 덮었어야 되고 자기도 죽을 수밖에 없는 길인데 이제순 목사님이 그 가서 초상을 쳤다 그랬어요. 그래서 환란 때에 그는 내 동지다 그런 얘기를 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럴 때 정말로 위안을 하고 손양원 목사님의 감옥에 들어 있고 가족들이 먹고 살기가 어려울 때 아무도 모르게 집에 양식 갖다주는 사람만 있어도 다 자가 절단 내는 그럴 때 참 굶어서 어려움을 당하도록 이렇게 항복하도록 하려고 하는데 몰래몰래 그에게 양식을 갖다 주면서 또 살 수 있도록 한 그런 사람들 그게 똑같이 환란당한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말씀한 것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고 갇힌 자를 동정하고 이런 자가 됐다.
그러니까 자기는 환란을 당하지는 않았지만은 자기도 그 환란을 당하면 그와 같이 똑같이 승리할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일제시대 때는 백목사님은 그런 얘기를 하죠. 그 자기 아는 사람이 오면 벌써 인사하면 한 편인가 싶어서 붙잡혀 갈 것이니까. 그만 피해서 가버리고 어쩔 수 없이 만나면 예예 바빠서요 그만 얼른 피해서 도망가고 그렇게 한다고 그런 사람이면 그 사람은 환난을 같이 겪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죠.
어려움이 있을 때 어려움에 있는 이 사람을 사귀고 동정하는 자가 되는 그것은 그 사람도 환란을 당할 때 같이 승리할 자 라 우리가 이런 걸음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소망이 있느냐 우리에게 준 이 큰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소망을 인해서 이렇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악의 편에 서지 않고 의의 편에 서고 마귀의 편에 서지 않고 성령의 편에 서도 이렇게  있게 되어지는 이 기쁨을 우리가 가진 자 되어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삶으로 인해서 산업을 빼앗기고 생활터전을 잃고 손해를 보고 직장을 빼앗기고 이런 일을 할 때도 양보하지 않고 이렇게 걸어간 이 사람 이 모든 것은 뭐 때문인가 소속이 다르고 소망이 다르고 생명이 다르고 지식이 달라서 우리에게 오는 어려움이라 이러니까 이런 어려움으로 포기하지 않고 우리는 계속해서 이대로 순종하고 살아서 이 구원에 성공이 되어져 가도록 애를 써 가야 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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