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2월7일 수야 주님과 하나 되는 길

페이지 정보

본문

24020733(마태복음 24장 40-44절)
제목: 주님과 하나 되어 사는 길
본문: 마태복음 24장 40-44절
 두 사람이 밭에 있으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오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반이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다면 깨어 있어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어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언제든지 자신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든지 듣든지 할 때 기분이 좋고 마음이 상쾌하고 개운한 이것으로 자기에게 은혜 받은 이런 것으로 표준을 하면은 우리는 껍데기가 되게 됩니다.
그렇게 기분 좋고 상쾌하고 개운한 그런 것은 불신자들에게도 있고 또 성령의 사람도 쾌락이라는 것이 있지만 껍데기 볼 때는 사람이 기뻐하는 이것이 이 사람이 기쁘고 저 사람이 기쁜 것이지만은 그 기쁨은 안 믿는 사람이 기뻐하는 거나 성령의 사람이 기뻐하는 것이 똑같이 그렇게 보여지지만 속의 알맹이는 둘인 것입니다.
아주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한 자리에 둘이 같이 일하고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버려둠을 당한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두 여인이 매를 갈고 있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팔레스틴 지방에는 밭이 많고 논으로 곡식 기르는 이런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게 다 잡곡을 하기 때문에 그 잡곡을 갈아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는 것이 팔레스틴 지방의 사람들의 식생활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집집마다 다 매가 있습니다. 옛날 기계가 없을 때는 옛날 우리나라도 농사를 지어 놓으면 겨울은 늘 방아 찍는 일이 할 일입니다.
쌀을 가지고 벼를 가지고 방아를 찍어서 밥을 해 먹는데 요사이는 기계로 이렇게 하니까 수십 석이라도 금방 찍지만은 그 당시에는 이렇게 맷돌을 가지고 갈아가지고, 하기 때문에 효율이 사실 많이 떨어집니다. 맷돌을 돌릴 때에 힘이 들기 때문에 두 사람이 양편으로 앉아서 서로 손을 마주잡고 돌립니다.
그때는 영 미개한 때니까 그렇게 이렇게 양쪽에 앉아서 맷돌을 가지고 돌리면서 곡식을 가는 일을 그렇게 합니다.
이것이 좀 더 진화되고 난 뒤에는 물레방아라 해가지고 물로 뭐 돌아가도록 해서 방아를 찍는 것이 나왔고 또 뒤에는 원동기를 사서 원동기로 이렇게 방아를 찍는 것이 되고 지금은 그만 전기로 이렇게 합니다.
이렇게 발달되어 나왔는데 여기 매를 간다 하는 것은 곡식의 껍질을 갈아내고 또 알맹이를 가루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는데 맷돌을 돌려서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맷돌을 돌리는데 두 사람이 양쪽에 앉아서 같이 돌리니까 똑같이 같은 일을 합니다. 그렇게 같은 일을 하지마는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이렇게 된다.
하는 것은 같이 맷돌을 돌리는 이런 일을 해도 하나는 구원 없고 하나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고 만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런고 하면 껍데기 행동은 똑같이 행동합니다. 똑같이 행동하는데 하나는 멸망받고 구원을 넣는다 하는 이것을 우리가 기억을 해야 합니다. 왜 멸망받고 구원을 얻느냐 껍데기는 꼭 같은데 그 알맹이가 달라서 하나는 멸망을 받고 하나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들을 때도 그저 마음에 기쁘고 상쾌하고 시원하고 이렇게 되니까. 그것을 은혜라고 생각을 한다고 하면 안 믿는 사람들도 어디 가서 기쁘고 상쾌하고 시원하고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때가 많습니다. 그것도 그러면 은혜가 되는 것 아닌가 그것도 은혜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이렇게 되고 맙니다.
매를 가는 것이나 일을 하는 것이나 우리가 여기에 매를 가는 것으로 말씀했지마는 가정에서 살림 사는 것이나 직장생활하는 것이나 어떤 입장에 있든지 말입니다. 외모는 보기는 꼭 같지만은 그 속에 알맹이가 달려서 하나는 멸망받고 하나는 구원을 받는다. 이렇게 생각하고 모든 것을 맞추면 그것이 어디든지 다 맞습니다.
꼭 같은 기쁨을 가져서도 멸망받을 기쁨 하나는 구원 얻을 기쁨이라 또 사람이 조심을 하는데 하나는 구원 얻을 조심 하나는 멸망할 조심이다. 똑같이 열심을 내는데 하나는 구원얻들 열심이요 멸망받을 열심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열심히 교회의 일을 잘하면 다 믿음이 좋은 줄로 그렇게 생각을 가지지만 교회 일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언제든지 그 사람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며 반대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일을 하는데 아주 열심히 앞장서서 나서서 일을 잘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생각하기로 반대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열심히 충성 때 일하는 사람은 믿음 있는 좋은 사람이라 구원을 잘 이루는 것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지만은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살펴보면 교회를 제일 해치는 자가 어떤 자가 해치느냐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할려고 할 때 반대하는 그 사람은 그렇게 많은 해를 주지를 못합니다. 무슨 일을 할 때에 앞장서서 열심히 교회 일을 하는 사람이 있고 또 반대해서 그 일이 안 되도록 반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교회를 해치던 사람이 되느냐 하면 반대하는 사람은 대부분 다 그 사람이 교회 일하는데 반대하니까 그 사람은 틀렸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교회에 대해서는 크게 해를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교회 일을 하는데 열심히 하고 앞장서서 일하는 사람은 껍데기 보기는 아주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나 속에 알맹이가 다르면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자기중심 자기 위주가 되어서 일을 할 때는 그 일을 함으로 아주 자기를 교회를 해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교회도 보면 교회를 누가 제일 망치느냐 교회에 열심히 일하는 목사가 망치고 장로가 망치고 집사가 망치고 이렇게 직분 맡은 자가 망치는 일이 많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뚜렷이 해치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지만은 그 속에 중심이 자기중심 위주로 이렇게 하다가 보니까 거기에 많은 해치는 일이 일어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두 사람이 매를 갈고 있는데,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고 하나는 데려감을 당한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매라 이렇게 매로 비유한 것은 이 매는 교회를 비유해서 매로 상징했습니다. 맷돌은 교회를 상징했는데 교회는 모든 잡곡들을 넣어서 갈면 가루가 되어 나와서 다 한 태에 섞여서 가루가 되어지면 그것을 솥에 넣어 찌면 먹을 수 있는 떡덩어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김가나 이가나 정가나 박가나 다 별별 종류의 사람 별별 개성의 사람은 다 교회에 와서 자기 개성이 다 부서져야 됩니다. 맷돌에 넣어서 갈면 부서지게 되는 것처럼 자기의 개성이나 지위나 그런 것은 다 부서져서 이제 자기는 진리로 한 덩어리 되고 영감으로 한 덩어리 되고 피로 한 덩어리가 되어진 그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로 한 덩어리 되었을 때 그것이 주님이 잡수실 수 있는 떡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는 떡상이라는 이 떡상이 있는데, 거기에 항상 떡을 해 놓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대접하는 떡이라 해서 떡을 해서 올려놓는데 그 떡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 그 성전 안에는 떡상이 있고 떡상에 떡을 해서 올려놓는데 그것이 성전 안에 있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는 하나님이 잡수실 수 있는 떡이 되어야 돼요.
내가 다 부서지고 다 갈아져서 내 주장도 내 생각도 내 성질도 다 갈아져서 진리와 하나 되고 영감과 하나 되고 주님의 피로 하나가 되어졌을 때 에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하나님이 잡수실 수 있는 떡이 되는 하나님의 양식이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두 여인이 매를 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 두 여인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말합니다.
왜 이 여인을 그리스도인이라 이렇게 말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주장 가지고 이렇게 살 수 있는 그런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주장을 다 꺾고 자기는 진리와 하나 되고 영감과 하나 되고 주님의 피와 하나 되어 살자인 것입니다. 그래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에는 주님은 우리의 남편이요. 교회는 신부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남녀 간의 그리스도인은 다 주님의 신부라 이렇게 비유로 말한 그것은 하나님은 남편이요. 교회는 신부로 이렇게 말하는 요것이 원형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남편이요.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신부가 됐다.
하는 그 말이 무슨 말이냐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도록 남녀 부부라는 이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베소서에 보면 결혼할 때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그렇게 해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을 두고 말씀하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이렇게 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고 하는 것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비밀을 여기에서 말한다. 했습니다. 이것은 육체의 부부를 말하는 것 아닙니다. 육체 부부가 결혼해서 이제 하나가 되는 그런 이치를 가지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져야 하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두 육체가 하나가 된다는 말은 두 부부가 동침하는 것을 가르켜 말하는 것 아닙니다. 두 부부가 결혼을 함으로 한 육체를 이룬다는 말은 어떤 말인고 하니 지금 우리가 구원을 이루려고 하면 영의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육의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 육체가 된다는 말은 육의의 구원이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육의 구원이 하나로 이루어진다 결혼하기 전에는 각각 자기 구원을 이루어서 자기가 잘 이루면 자기 구원이 잘 되어지고 자기 구원을 잘 못 이루면 못 이루는데 이제 자기 육체 구원을 자기가 자기 혼자 이루지만은 결혼한 다음에는 개인의 육체 구원이 두 사람이 합해서 한 육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가정 구원이라 부부 구원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아무리 남편이 구원을 잘 이루었어도 아내만 아내가 없으면 좋겠는데 아내가 있으면 아내의 구원이 하고 남편 구원하고 둘이 합해 가지고 한 구원이 된다. 이 비밀이 크다 이렇게 말씀을 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부부관계에 이것을 하나님이 계시로 나타내는 형식 계시로 나타내는 것 그 호세아스에 보면 본 남편이라고 했고 우리는 신부라고 했고 또 거기에 간부가 있습니다. 간부를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무엇이 세상이냐 세상은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된 이것을 세상이라 이 세상이 간부라 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부부가 되어서 영생하게 되는데 하나님을 버리고 악령과 악성과 악습이라는 이 세상과 짝이 되어서 삶으로 인간이 멸망을 받는다. 해서 이 세상을 간부라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본 남편 있는데, 간부가 좋다고 간부가 내 먹을 것  입을 것 다 해 주었다고 간부를 따라가다가 마지막 죽을 때가 되면 그때사 후회하면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셨고 그분이 영생하고 그분과 하나 되었을 때에 영생하는데 그분을 버리고 세상과 짝이 되어서 이렇게 한 것은 멸망이었구나 하는 것을 죽을 때 그때야 회개를 합니다.
하나님보다 낮게 여긴 세상 그 세상은 나를 속인 것이요. 나를 꼬인 것이요. 나를 미혹한 이것을 깨닫고 죽을 그때야 세상을 배반하고 본 남편에게로 돌아간다고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8장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어떻게 하면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사치스럽게 하고 자기를 기쁘게 한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중심의 사람 자기 위주의 이런 삶을 사는 예수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과부가 아니라 과부가 아니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남편 없는 게 아니란 말 아닙니까 나는 과부가 아니라 나를 책임지고 내가 의지하고 바라보고 나의 머리가 되고 이런 자가 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떨어져서 남편이 되어 있는 하나님인데 하나님과 떨어졌으면 과부가 될 것인데 나는 과부가 아니라 그러면 나는 어떤 자인가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왕으로 안은 전자라 내가 이렇게 여왕으로 앉은 자라고 하기 때문에 하루 동안에 멸망을 받는다고 계시록 18장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남편 된 이 면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육의 부부로 이것을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육의 부부로 나타낸 이것이 상징이기 때문에 이 면에서 우리는 살펴보아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을 바로 깨달아 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결혼해서 부부가 되면 요사이 세상은 많이 변질이 되어서 이것도 바꾸어져 있지만 성경이 가르쳐주는 성경대로의 부부라고 하면 결혼을 했으면 아내의 모든 것은 남편이 다 책임을집니다. 아내의 모든 험이나 아내가 지은 죄도 남편이 책임을지고 벌을 받아야 됩니다. 옛날은 그렇게 그랬습니다. 아내가 죄를 지었으면 남편이 가서 징역을 살아야 된다.
아내의 모든 나쁜 점은 남편이 다 책임을지는 것입니다. 아내는 아무것도 없는 거지인데 남편이 큰 재벌가면 벌써 결혼할 때 그 재벌가의 모든 물질이 다 아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면 남편이 다 아내의 모든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또 소유권이 하나가 됩니다. 모든 물질이 남편의 것인데 아내의 것이 됩니다.
자 그러면 성경이 가르쳐주는 부부는 혼인을 하게 되면 아내의 모든 험과 점 잘못된 것은 남편이 책임을 져야 되겠고 남편의 잘못된 것도 다 아내가 책임을 져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같이 책임을지는 것입니다. 또 소유가 하나인 것입니다.
아내의 소유가 남편의 것이 되고 남편의 소유가 아내의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또 결혼을 하고 나면 부부는 유별한 것입니다. 아깝단 사람이지만 마치 한 몸 된 것처럼 동거동행을 하게 됩니다. 또 결혼을 하고 나면 부부는 유별한 것입니다. 부부가 합해 가지고 자녀를 낳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이것은 인간이 부부되어지므로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우리가 예수 그리도와 우리가 하나가 되므로 어떤 결과를 맺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므로 주님이 우리를 다 책임지고 우리는 주님에 대해서 다 책임을 질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깨끗하신 분이니까.
우리만 더럽단 말이에요. 이러니까 우리의 모든 죄 잘못 삐뚤어진 것은 주님이 대신 다 형을 받아가지고, 갚아주어서 우리는 죄가 없는 이런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주님은 완전히 하나님으로 인하여 삶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것도 땅의 것도 다 차지하게 됐습니다.
이 세상은 마귀의 것인데 예수님이 마귀와 싸워서 승리함으로 다 차지한 것입니다. 마귀도 죄도 사망도 온 세상을 다 예수님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것이 다 우리 것 되는 것입니다. 내 것 되는 것입니다. 또 결혼이 되면 동거동행을 하게 됩니다.
항상 같이 누워 자고 같이 사는 것처럼 주님과 우리는 동거동행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지고 모든 희노애락이 하나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또 주님의 모든 영광이나 기쁨이나 모든 실력이 다 아내의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제 주님과 하나 되어 사는 이것이 얼마나 복 있는 길인 것인지 모릅니다. 또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되므로 사람은 남여가 동침으로 자녀를 낳지마는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되어서 믿음의 자녀를 낳게 됩니다. 우리가 어디든지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나와 주님과 하나 되어 복음을 전합니다.
나와 주님과 하나 되어서 복음을 전해서 그 사람이 택함 받고 부르심 받아서 중생이 되어져서 예수 믿는 사람이 되어졌으면 나는 그를 낳은 이런 자기가 됩니다. 내 자녀가 되겠죠. 믿음의 자녀 어떻게 낳았느냐 진리와 하나 되어 낳은 자녀요 영감과 하나 되어 낳은 자녀요 주님의 피와 하나 되어 낳은 자녀인 것입니다.
주님이 기쁜 것이 내 기쁨이 되고 주님의 근심이 내 근심이 되고 이렇게 되어질 수 있는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부부라는 제도를 통해서 주님과 우리와의 이 관계가 어떤 관계가 되는가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우리와 하나 되는 관계 주님이 나의 남편이 되고 나는 주님의 신부가 되고 주님은 나의 생명이 되고 나는 주님의 지체가 되고 주님은 나의 주인이 되고 주님은 주인이 되고 나는 주님의 집이 되고 주님의 몸이 되고 이렇게 되어지는 것은 인간이 결혼해서 부부가 하나 되는 것과 같은 이런 역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에 사는 기간 동안은 무엇하는 기간이냐 주님과 하나 되는 기간입니다. 주님과 하나 되는 것 우리 사람이 결혼해서 살다가 보니까 오래 가니까 생각이 하나되고 소원이 하나되고 지식이 하나되고 이렇게 하나가 되어져 갑니다. 그와 같이 이제 주님과 나와 하나가 되어져 가야 합니다. 얼마나 하나가 되어졌느냐에 따라서 행복하냐? 행복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여기에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신부가 지아비를 위하여 단장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그렇게 단장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 사는 동안에 주님을 위해서 자기를 단장하고 주님과 하나 되는 이것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결혼해서는 당장에 결혼했다고 하나는 안 됐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소원이 다르고 비판 평가가 다르지요 이런데 점점 살아가면서 자기 생각을 양보하고 상대방을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세상에서 주님과 하나 되는 이 걸음을 우리가 걸어가야 됩니다. 여기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메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는 말은 이렇게 주님과 하나된 것은 데려감을 당하지만은 주님과 하나된 자기가 되지 않았다면 데려감을 당하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이 지옥 간다는 말인가? 우리의 영이나 마음이나 몸 자체가 지옥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몸의 몸과 마음의 기능이 주님과 하나 되어 움직이지 아니하고 주님과 하나 되어 살지 아니한 모든 요소는 다 지옥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이 기능의 요소는 얼마나 좋은 요소인지 모릅니다. 자기가 보는 것도 기능이 있어야 보지요. 듣는 것도 기능이 있어야 더 좋습니다.
자기가 이 손을 사용하는 것도 기능이 있어야 사용하는 거예요. 기능이 없으면 아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이 기능을 가져가고 가져가지 못하는 데 따라서 하늘나라에서의 대우와 환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 기능을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주님과 하나된 이것이 될 때 그것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자기를 길러 가야 됩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거기에서 먼저 진리와 하나 되고 그다음에는 영감과 하나 되고 그다음에는 주님의 피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하나가 되어서 사는 것을 두고 세 사람으로 사는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새사람은 피와 성령과 진리로 된 사람을 세 사람이라 하고 옛사람은 악령과 악성과 악성으로 된 사람을 옛사람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 새 사람이 되어 있는 이것이 새 사람은 예수 그리도가 생명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우리의 영 마음 몸 영과 마음과 몸의 기능이 되어진 이것이 새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현실 한현실에서 자기가 진리와 하나 되려고 내 생각대로 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되겠다.
그래서 자기 속에 악성을 죽이고 악령을 죽이고 악성을 죽이고 악습을 죽이고 진리와 영감과 피와 하나가 돼버리면은 그럼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 따라 살고 영감 따라 살고 주님의 피로 사는 자기만 되면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어지면 된 것만큼 우리는 주님의 것을 다 자기 것 삼아 살 수 있고 하나 된 것만큼 주님의 모든 희노애락을 자기도 그렇게 누리며 살 수 있고 주님의 지위도 우리도 다 누리며 살 수 있게 되는 요것을 가리켜서 주님보좌 우편에 앉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있는 힘을 다 기울여 세상을 사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쓰기
Note: 댓글은 자신을 나타내는 얼굴입니다. 무분별한 댓글, 욕설, 비방 등을 삼가하여 주세요.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