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12월6일 수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페이지 정보

본문

23120633(고린도 후서 5장 8-10절)
제목: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본문:고린도 후서 5장 8-10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 그런 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니라.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우리가 선악간에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서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뭐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이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우리가 담대하게 이렇게 소원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담대하게 이렇게 살 수 있느냐 구속받은 자로서 담대하게 이렇게 세상 살 수 있는 세상을 살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 그런가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담대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해 살 때는 담대하지 못했습니다. 왜 죽을까?
해서 담대치 못하고 비겁했고 이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행복스러운 그런 것을 가지지 못하고 빼앗기고 상하게 될까 해서 담대하질 못했고 또 우리는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의 능력을 도움 받아야 될 것인데 도움받지 못할까 해서 담대하지 못했던 그런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는 그런 어두움을 벗고 참된 이치를 알게 됐고 참된 이치를 깨달아 알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우리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세상에 대해서 이렇게 담대하게 살 수 없는 그런 우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난 이후에는 참된 이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과거는 모든 것이 세상에 이런저런 주권이 있는 줄 알고 살다가 보니까, 담대하지 못했지만은 바로 깨닫고 보니까, 우리 주님에게 죽고 사는 생사의 주권이 달려있다.
하는 이것입니다. 세상에서 천인 만인이 이것은 죽는 방편이라 해서 그런 방편으로 우리를 죽일려고 해도 우리를 죽일 수 없고 우리를 죽이고 살리는 것은 주님 한 분에게 확실히 주권이 있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의 살고 죽는 데에 대해서 주님이나 두려워할까 주님 외에 세상 어떤 것도 두려워할 리가 없게 된 것입니다.
또 우리는 세상에 이런 저런 것에 얽매여서 거기에 붙들려 사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정치에 이런 회사에 이런 일에 이런 사람에 붙들려서 그런 것에 대해서 두려워서 그것에 비유를 맞추어 종 되어 살던 그런 우리들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주권을 가지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나 위해 사장이 이런 회사가 이런 단체가 이런 정권이 우리의 흥망성쇠를 주권하는가? 해서 거기에 얽매여 살았지만 우리의 모든 흥망성쇠는 주님 한 분에게 주권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이후에 새로 이 이치를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공연이 헛되이 종노릇 했고 헛되이 비급했던 우리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할 때에 땅에 있는 수만 가지의 협조를 받아야 일이 되어집니다. 이러니까 항상 그들에게 종이 되고, 맞지 않아도 옳지 않아도 창기의 인격성을 가지고 모든 데에 아부해야 되고 그것에 붙어야 되겠고 그렇게 살아야 할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생사 화복 흥망성쇠의 주권을 주님이 가지고 있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알았기 때문에 사람 보기에는 두려워하는 것 같이 보여지지만은 그렇게 저렇게 행동하는 것은 주님의 비위를 상할까 주님이 섭섭해 할까 해서 하는 것이지.
세상에 대해서 조금이나 두려움이나 염려는 없는 이런 우리로 살 수 있는 우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상대할 때에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거기에 대해서 비위을 맞추려고 하는 그것은 하나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요 주권자요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한 분을 상대해서 하나님의 노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고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지. 아무 주권 없는 사람으로 인해서 하지 않는 이런 사람이 됐습니다.
과거에는 세상을 상대하던 것이 세상이 이런저런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거기에 복종하고 머리를 숙이고 이렇게 했지마는 이제는 주님 한 분이 주인이요.
주권자요 왕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두려운 것도 주님 한 분만 두려워하고 주님이 노할까 염려되는 것도 주님 보고 염려하고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되겠다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도 우리가 해야 되겠고 우리는 간청할 것도 주님에게 간청하고 주님을 기뻐시게 하고 주님에게 의지하고 주님의 지도를 받고 주님과 의논하는 주님과 우리는 관계를 맺을 뿐도 주님 한 분뿐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잡고 이렇게 세상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데는 수많은 인간과 만물을 상대하지만 껍데기는 인간을 상대하고 만물을 상대하지만 속으로는 주님 한 분만 상대해서 모든 사람과 만물을 상대하는 이런 우리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담대하기 담대하여 살 수 있는 그런 우리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층층이 주인이 있고 자기 위에 상관이 있고 자기 위에 사장이 있고 어른이 있고 자기 위에 회장이 있고 대통령이 있고 이렇게 되어 있지마는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해방되었고 이제는 주님 한 분만 상대하는 이런 사람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우리 위에 열 계급 스무 계급의 상관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상관은 주님이요. 우리의 주인은 주님이요. 주님이 왕이신 것입니다. 사람이 우리에게 어떻게 할 때 무슨 일을 하는지 사람 보기에는 이렇게 저렇게 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을 움직이는 이도 있고 이 사람을 저 사람을 이런 물질을 주님이 주권하시고 섭리하셔서 주님의 뜻을 이루고 계시는 그런 주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한 물질 상대할 때에 거기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갈 수 있는 우리가 돼야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주님의 소원을 알고 주님의 뜻을 알려주는 전달 기관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명령을 받을 때에 이 기관을 통해서 이런저런 명령을 받을 때 주님 한 분이 주권을 가지고 이런 기관을 통해서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명령을 전달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명령이라도 기관의 명령이라도 주님의 명령이 그를 통해서 왔으니까.
그 명령은 주님의 명령으로 알고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사는 죽도록 충성하는 그런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충성하는 사람을 볼 때에 이 사람은 이 사람에게 충성한다. 이렇게 보여지지만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한분이신 주님을 보고 주님을 상대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복종하고 충성하다가 명령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온 명령이 아니고 그것이 그 사람 단독으로 나온 명령이라고 하면, 그 명령에 순종하면 주님에게 반역하는 역적을 통해서 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반역에 기를 들고 강하게 투쟁하고 반대하고 거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것이 왔던지 주님이 계약의 법칙대로 주는 것이라고 하면, 사람이 내게 그것을 주나 그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은 아니지마는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나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관인 줄 알고 우리는 존대하고 그 사람에게 대해서 나에게 은혜를 전달하는 전달함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분을 주인으로 알고 감사하고 이렇게 순종하면 안 됩니다.
그분은 주인이 아니라 전달하는 기관으로 알고 감사하면서 참 주인은 주님이요. 그는 주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기관으로 대우하는 우리가 돼야 됩니다. 우리가 출생될 때에 우리를 낳은 부모에 대해서 우리는 인간 중에 제일 존대해야 합니다.
부모가 나를 낳았다고 우리가 생각하지 않고 우리를 낳은 그 은혜는 주님이 부모를 통해서 나를 낳았기 때문에 주님을 우리는 나를 낳아준 주님으로 알고 감사하고 다만 부모는 나를 낳을 수 있도록 내가 출생되도록 낳아주고 길러준 여기에 대해서 감사하지만은 나를 사랑해서 주님이 자원도 주시고 사랑하는 마음도 주시고 성의도 주셔서 나를 이렇게 기를 수 있는 양육의 기관이 되어서 하나님의 심부름을 부모가 했지마는 참 양육하신 이는 주님이기 때문에 깊은 사은은 우리가 주님 한 분에게 하고 또 사은의 기관인 부모에게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우리는 담대하여 하는 담대하다는 요 말씀을 우리가 똑똑히 바로 깨닫고 해야 합니다. 이 담대는 세상을 향하여 담대한 것입니다.
과거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세상에 붙들렸고 세상이 주권자인 줄 알고 세상이 원동인 줄 알고 시발인 줄 알고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세상에 종이 되어 살았지마는 세상의 비유를 맞추고 이렇게 살았으나 그 세상은 주님의 은혜의 기관으로 서서서 이렇게 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세상에 출생됨에 대해서 주님에게 감사하고 그다음으로, 주님이 인간을 통해서 나를 출생했기 때문에 나를 낳아주신 부모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 계명의 사 계명이 지나고 난 다음에는 부모에 대해서 공경해라 하는 오계명을 인간에 대한 계명 중에 첫 계명으로 기록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우리가 담대하여 하는 요 담대라는 것을 우리가 똑똑히 구별해서 알아야 우리가 소경된 우리가 눈이 떠 있는 것입니다.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그럼 뭘 원한다는 말인가?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 우리는 영육이 하나 되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런 우리입니다. 영육이 하나되어 사는 그런 우리가 이 몸을 떠나는 것은 이 몸은 벗을 몸이오 버릴 몸입니다.
이제 이 몸을 버리는 것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기 위해서 이 몸을 벗는 것입니다. 마치 누에가 꺼풀을 벗는 것처럼 우리는 이 몸을 벗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서 영원히 살게 될 그런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몸을 떠나 이 세상을 떠나서 이제 이 몸을 떠나서 이 몸은 신령한 몸으로 완전히 변화시켜 영원히 사는 자기가 되는 이것을 원하는 것을 두고 말합니다. 주님은 지금으로 주님이 지금은 영으로 계시지 않고 영육으로 계십니다.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영으로만 계셨지마는 세상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서 대속하신 이후에는 주님이 신령한 몸이 된 이 영육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영육으로 계시지만은 주님은 신인양성일위로 계십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영육으로 계시고 영육으로 계시지만은 신령한 몸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하나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우리에게 보일려면 보일 수 있고 보이지 않으려면 보이지 않을 수 있는 이런 육을 가진 이런 거룩하게 변화된 이런 몸을 가진 주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몸을 떠나 하는 말은 우리는 모든 시간과 공간의 제재를 받고 제한을 받는 약한 몸을 가지고 살고 있는 우리가 어서 이것을 벗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서 주님과 함께 사는 이것을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령한 몸이 되면 이 우주를 1초에 수만 바퀴 돌려고 해도 돌 수 있고 우리는 저 미국에도 있고 여기 되어 있고, 같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런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이런 우리로 살 수 있는 몸이 되는 것이 신령한 몸입니다.
우리가 부활해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고 나면 오늘날 탄도미사일 뭐 로케트 비행기 뭐 아무리 빠른 거라고 해도 우리가 움직이는 것을 따라오려고 하면, 몇백 년 몇 천 년 걸려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우리가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한 신령한 몸인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러면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어서 성화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시간과 공간을 모든 생사를 초월한 그러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해서 주님과 같이 있기를 원하는 요것이 우리의 소원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몸을 가지고 이 영육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이런저런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지요 21세기 이런 과학의 모든 편리한 것을 누리고 있지마는 그런 것보다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한 후 신령한 몸이 되어지면 이 몸은 오늘 세상에 사는 이 몸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굉장한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되려고 하면, 이제 이 세상에서 얼마나 이 준비를 해야 하느냐 하는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이 몸을 가지고 땅의 것을 얼마나 차지 않으냐 우리는 이 몸을 가지고 이 세상 것을 통해서 이제 이 모든 것을 다 차지할 수 있는 이런 자로 변화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하늘에 있는 모든 것도 소원하고 땅에 있는 이 모든 것도 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이런 우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전부 썩을 것 뿐인데 전부 형벌 받을 것 뿐이오 가치가 없는 썩을 것이오 약한 것이오 욕된 것이오 수치스러운 이런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혈육의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썩을 것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욕된 것을 영광스러운 것으로 유한한 것을 신령한 것으로 바꾸어 가지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것이지.
이것은 아무리 가져도 아무 가치가 없는 결국 죽고 멸해질 수밖에 없는 이것입니다. 이것이나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가치 있는 것으로 바꾸어 가지려고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의 능력이 있고 영감의 능력이 있고 진리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 능력으로 썩을 것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욕된 것을 영광스러운 것으로 유한한 것을 신령한 것으로 바꾸어 가질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영감을 막바로 받아가지지 못하지만은 성경을 읽고 듣고 성경대로 사는 데서 기도하고, 양심 써서 성경대로 사는 우리가 되어지면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우리가 되고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진리대로 살 수 있는 사람 되고 진리대로 살 수 있는 사람 되면 영감으로 살 수 있는 사람 되어 영감으로 살 때에 썩을 것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욕된 것을 영광스러운 것으로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유한의 것을 신령의 것으로 우리는 바꾸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근심은 이 근심이 우리가 근심이 되는 우리가 돼야 합니다. 우리는 땅에 있는 이 근심 걱정 가지고 사는 그 사람이 온갖 근심 걱정에 붙들려 살지만은 신앙이 있는 사람이 가보면 걱정할 것 하나도 없는데 그렇게 죽겠다고 걱정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걱정하지 말아라 하니까 이런 입장에 처해 보지도 안 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고 남의 일은 그른 식은 죽 먹듯이 그렇게 쉽게 말하는가? 하지만은 아직까지 이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권자요 창조주요 만왕의 왕이시오.
영원 불변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이 구원을 입혀 주시고 이제 우리를 신령한 몸으로 우리를 부활시켜 주와 함께 영원히 살도록 하시는 이 사랑을 몰라서 그런 걱정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이런저런 문제가 왔을 때 살펴보면 하나님이 왜 그랬을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당신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여기에서 우리를 주와 함께 거 할 수 있는 우리를 영원이 이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는 자기가 되도록 하려는 주님의 큰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믿고 이 길을 걷는 사람은 걱정 없이 안심하고 사는 자기가 됩니다.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할 때에 아 먹고 싶다. 보고 싶다. 탐스럽다 지혜를 얻을 만큼 그렇게 좋게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해도 이것을 먹어야 되겠다고 그걸 취한 것이고.
남편도 던져 버리고 자기 혼자라도 먹어야 되겠다고 싶은 이런 마음이 든 것이 무엇 때문이냐 그것은 마귀에게 꼬여 가지고 그런 것이지. 실제로 그 효력이 난 것은 아닙니다. 그 선악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말씀한 대로 죽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은 먹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하나님도 버리고 남편도 버리고 선악과를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이런 자기가 되어진 것은 마귀의 미혹을 받아서 거꾸로 보여 그런 것입니다. 실은 먹고 나니까 하나님이 정해 놓은 법대로 죽고 만 것입니다.
오늘도 마귀에게 꼬이고 나면 이 세상 것 이것 필요하다 사장이 주권을 가지고 있다. 이런 꽤 많은 이런 사람이 주권을 가지고 지금 이렇게 역사하고 있다. 다 그것으로 인해서 두려워하고 종되고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오늘 우리는 담대할 수 있는 이런 우리가 돼야 합니다. 주님이 영원불변하신 주님이요. 창조주요 주권자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에 주가되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이런 큰 구원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인 줄 믿고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뻐시게 하는 우리가 돼야 됩니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우리가 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느냐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나타내는 주님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가만 보면 복음 전하기 위해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만 은행 대출을 내가시고 이렇게 전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에게 대해서 하나님이 다 복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에는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그런 축복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가 가진 힘을 자기가 가진 것을 가지고 복음 전하는 데 다 쓰일 수 있는 자기만 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큰 축복의 역사가 찾아옵니다.
이러므로 오늘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어떤 형편 처지에 있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주님을 나타내고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전할 때에 구주가 나셨다 구주가 오셨다 주님이 오신 그것에 대해서 알리는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을 성경에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탄절을 기해서 우리는 이렇게 주님을 증거하는 증거의 기회를 삼아서 주님을 증거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크신 축복의 역사가 우리에게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쓰기
Note: 댓글은 자신을 나타내는 얼굴입니다. 무분별한 댓글, 욕설, 비방 등을 삼가하여 주세요.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