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9월13일 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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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333(베드로후서 3장 10-13절)
제목:주의 재림 준비
본문: 베드로후서 3장 10-13절
 그러나 추주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는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예 여러 시간 계속해서 재림에 대해서 말씀을 배우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는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주님이 그대로 말씀하시기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오늘 사람들이 악령의 유혹을 받아서 자꾸 지상현실주의로 기울어지고 있고 또 심령이 어두워지니까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접촉하여 느껴지는 대로 그것만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은 등하니 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주님의 재림이 중요하기 때문에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이 세대가 다 지나기 전에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고 보증하는 말씀을 주님이 다시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일곱 가지 기억할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첫째가 중요하고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
하는 것을 알고 이것을 의심없이 확실히 믿고 그러면 재림이 오면은 우리는 이제 끝이 나니까 절망을 할 것이 아니고 재림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이루어질 지극히 큰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재림 준비하기 위해서 거룩과 경건으로 사는 데에 그대로 실행할려고 애를 쓰는 서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실상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다 무엇인가 잘못된 원인이 있어서 실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일곱 가지 중에 첫째로, 노아의 때와 인자의 때가 같다 했는데 그때 사람들도 다 자기 현실에 의식주 문제 가정 문제 사업 문제 자기의 거처 문제에 다 주력하여 살고 홍수로 멸망을 당한다. 하는 그 말씀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도 노아는 그렇게 살지를 아니했습니다.
땅 위에 살려고 하면, 의식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살고 죽는 문제가 중요하고 또 자기의 온갖 직책과 사업이 중요하지만은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홍수 심판이 더 중요하다 하는 것을 깨닫고 홍수 심판 준비를 하는그 일로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노아의 일생 생활이라 하는 것은 홍수 심판을 면하기 위한 전생활이었다. 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홍수 심판은 생각지 않고 자기의 온갖 방편으로 자기를 위하는 그런 일을 했지만은 아무리 자기를 위하여 준비해도 홍수 심판에 다 전멸되고 말았다. 하는 것을 첫째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매일매일 생활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 우리 정신이 불심판이 내린다 하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마음을 두고 내가 세상 이런 저런 모든 생활을 재림에 관계를 맺어 재림에 때 어떻게 되겠느냐 여기에 관심을 깊게 가지고 재림의 때 불타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일을 할려고 애를 써 보면은 우리는 내가 얼마나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자기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애녹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 생활함으로 죽지 않고 성천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에녹은 불교 모양으로 세상을 버리고 저 산속에 들어가 사는 그런 염세주의로 산 것이 아닙니다.
에녹도 우리와 똑같이 자녀 낳고 기르고 이렇게 가정생활하고 세상생활을 다 하다가 산 채로 승천했다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노아도 이런저런 분야에서 가정생활하고 사업하고 의식주 생활을 다 하면서 방주를 만든 것처럼 오늘 주님이 재림하실 불심판이 가까운 지금 우리는 불심판에 멸망을 받지 않도록 준비하는 그일을 준비해야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학교 가서 공부하지 말라는 것 아니고 장사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사업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가정생활 하면서 사업을 하면서 공부를 하면서 이런저런 것을 배우면서도 불심판에 불타지 않도록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자기를 시험해 봐야 합니다.
내 전 언행 심사에 모든 행위나 정신이나 생활이 불심판에 어떻게 될런지 여기에 중점을 두고 불심판에 불타지 않을 수 있는 이런 자기가 되려고 준비하고 있는 자기인지 우리는 이것을 스스로 판단해 봐야 합니다. 지금 이 하늘과 땅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예수님의 재림의 불심판을 사람들이 무시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구원하시려고 하는 경건한 사람과 경건치 않은 사람들이 판별이 되는 그 기간 동안 두고 있지 요것이 다 판별이 되면 하늘과 땅은 다 불사르게 되어진다 그때 불사르기 위해서 보존하고 있다.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크고 견고한 것도 저것도 주님이 재림하시면 다 불탈 것인데 큰 것도 묘한 것도 아름다운 것도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는데 의인을 만드는 데 쓰이고 악인을 만드는 데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접해지는 그 모든 것은 우리 보기에 단단하고 튼튼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다 불탈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의인을 만드는 데 쓰이고 악인을 만드는 데 쓰여져서 의인과 악인을 다 만들고 나면 이 모든 것은 불에 타게 됩니다.
하나님은 홍수 심판 때에 홍수로 멸하신 것과 같이 주님의 재림의 때에 불로 멸하지만은 그 심판이 오기까지 심판이 오기 전은 하나님의 한 없는 사랑과 긍휼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하루가 1000년 같고, 1000년이 하루 같다고 그렇게 말씀을 한 것입니다.
회개한 의인들을 볼 때에 어렵고 힘들게 사는 이 세상에 살게 하는 것이 1000년을 지내는 것처럼 그렇게 지루하게 느껴지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 볼 때에 1000년이 하루같이 너무 세월이 빨리 지나가는 데 대해서 마음이 단식되어지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만나고 통과해지는 고 현실은 거룩과 경건으로 의인이 되느냐 죄인이 되느냐 그것이 결정 나는 그 현실입니다.
현실을 바로만 통과하면 거룩과 경건을 이루어 가면 의인이 되고, 의인이 되면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상속 받을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되고, 부요의 사람이 될 것인데 그 기회를 놓치는 것을 볼 때에 마음이 안타까운 마음이요. 아직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요
남은 시간은 손해 보지 않고 의인을 이루어 가는 이 걸음을 걸으라고 권면해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갑자기 옵니다. 사람들이 뜻하지 못할 때에 주님의 재림이 오고 주님의 재림이 오면 이제 모든 것이 불에 타서 풀어지게 됩니다.
밤낮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혹 이상한 징조만 보여도 주님의 재림의 땐가 여기에 마음이 기울어지고 여기에 중요성을 두고 이렇게 사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유업으로 상속시켜 줄 유업을 도둑맞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 가 전서 5장에는 깨어있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재림이 갑자기 오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이 되면 주의 재림을 인해서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고요한 때를 주시고 주님이 심판을 내리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다 같이 살고 있지마는 주님의 재림을 느껴서 이 날을 준비하는 사람은 고요한 때를 만나서 얼마든지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이렇게 구원을 이룰 수 있게 되고 그 구원을 다 이루고 나면 하늘과 땅은 다 불에 타서 풀어지게 됩니다. 하늘이라고 하면, 이 우주의 공간들을 말하는 것이요.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진다는 체질을 그것은 속에 이런 종류 저런 종류의 것을 다 말합니다. 그것이 다. 불에 타서 완전히 원소로 돌아가고 그 원소를 가지고 새로 새 하늘과 새땅을 만들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불탈 때에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만든 것이 의입니다.
역사의 큰 구원을 이루어 간 사람들은 의을 이룬 사람들은 다 거룩과 경건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따지고 구별하는 생활을 했다 말입니다. 이렇게 순종해서 만든 것이 의인데 의는 불타지 않습니다. 노아 홍수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되어서 멸망을 했지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만이 참되다고 인정하고 하나님에게 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산 자에게는 홍수가 신앙생활한 효력을 나타냈고 홍수가 그에게 큰 은혜와 축복이 되어졌지 심판이 손해를 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경건을 이루어서 산 노아 여덟 식구는 홍수 심판이 이 세상 전부를 다 차지할 수 있는 이 축복을 가져다 준 것이 홍수 심판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림의 때도 주님의 재림의 불심판에 대해서 신실히 듣고 여기에 중점을 두고 두려워 떨면서 거룩과 경건으로 준비한 사람들은 이 불심판이 들어서 준비한 사람의 공로에 효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불심판이 들어서 조금도 손해를 보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사드락 매삭 아벤느고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청하여 그 길 들어가니까 그 길 들어가니까 그들을 불로 태우는 불이 왔지마는 그  풀무불이 그들을 태우지 아니하고 그 풀무불은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큰 축복이 오도록 만든 것이 풀무불인 것입니다.
풀무불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하나의 계시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릇과 경건으로 살아 의를 이룬 이 의만이 구원을 얻는데 이 의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으로 마련한다고 했습니다.
거룩한 행실은 어떤 것을 가리켜 거룩한 행실이라 하는가? 하나님이 알려주신 말씀 이 계약의 말씀이요. 교훈의 말씀이요. 우리의 생애 법칙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가지고 이 말씀에 맞나 안 맞나 이 계약에 맞는지 틀리는지 이 교훈에 맞는지 구별하는 것을 가리켜서 거룩한 행실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번 거룩한 행실을 만들었으면 다인가 우리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으로 사는 것을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한 번 거룩한 행실과 경건으로 살았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죽는 날까지 거룩한 행실과 경건으로 사는 거룩으로 구별하는 일을 하고 구별해서 옳은 것을 찾고 더 깨끗한 것을 찾고 더 참을 찾아가는 걸음을 걸어가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일생을 그는 거룩 생활로 자꾸 구별하고 구별해서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도록까지 구별했다고 했습니다.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지만은 알지 못함이 없으신 주님 앞에 설 것이기 때문에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 앞에 내 잘못된 것을 알려달라고 호소하는 그런 기도 생활을 한 것입니다.
자기가 있는 힘을 다 기울여서 잘못된 것이 있는가 살펴 자기의 전생의 잘못을 알고는 주님의 대속에 공로에 고하여 사죄 받고 깨끗함을 받고 이제 양심에 가책 할 것이 없을 정도로 자기를 깨끗게 했지마는 내가 모르는 삐뚤어진 것이 또 있을 수 있으니 주님 앞에 물어 가지고 그것을 알려고 염려하면서 두려워하고 주님 앞에 간구하는 생활을 한 것이 사도 바울의 경건 생활이오 영감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경건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을 가리켜 경건이라 합니다. 디모데전서 사장7절로 8절에 보면, 경건을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연습하는 것은 한 번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다시 재심사고 다시 재심사하고 이래서 계속해서 이 세상 떠날 때까지 우리는 연습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과 대화를 하고도 돌아보면 내가 요 말은 안 했으면 될 것인데 괜히 이 말을 해서 내가 손해를 보게 됐구나 말을 할 때는 요 말은 해야 되겠다.
따지고 따져서 말을 하고도 돌아보니까, 고 말은 사랑 면이 모자란 말이로구나 화평면이 모자란 면이구나 경건면이 모자라구나 겸손면이 모자라구나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양식 주는 면이 모자라구나 우리가 돌아보면 말을 한마디 하고라도 그만 거기에 모자란 것 잘못된 것 우리는 많이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이래서 그것을 하나하나 찾아서 또 회개하고 사함을 입고 의를  입는 이 걸음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해서 실행을 하면 실행한 것만치 자신이 변화가 되어집니다. 자기가 성화가 됩니다.
자기가 변화되고 나니까 변화되기 전과 후가 사색하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성화되기 전과 후에 모든 감각과 비판과 평가가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가 거룩이 좋아서 거룩과 경건의 이 일을 계속한다.
할지라도 성도들은 마지막 세상 떠날 때에는 더 자기가 고칠 것이 많고 고쳐진 것은 별로 없다 하는 것을 느끼게 되어서 마지막에는 나는 무익한 종이라고 하는 그것을 주님 앞에 고백하고 겸손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노년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라고 말한 것은 사도바울이 우리보다 삐뚤어진 것이 많아서 괴수 죄인이라 한 것 아닙니다. 그분이 거룩과 경건으로 연습을 하니까  자신이 거룩하게 성화되어지니까. 이전 성화되기 전 모든 평가와 성화되고 난 다음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에 과거에 모든 것이 다
잘못됐다고 그렇게 통계를 맞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생활을 할 때에 이것으로 불타지 않을 수 있는 이것을 마련하게 됩니다. 주님의 재림의 때에 불타지 아니할 여기에 가치를 두고 불타지 않을 이것을 마련하는 여기에 중요성을 두고 우리 생활을 다 기울여 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양면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아직도 옛사람이 남아있고 신령한 성화된 새사람도 있지만은 육체 자아도 있습니다.
우리는 영이 있고 마음이 있고 몸이 있는데, 성화된 마음의 기능도 있지만은 성화되지 않은 마음의 기능도 있고 성화된 마음의 기 몸의 기능도 있지마는 성화되지 않은 몸의 기능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화된 부분과 성화되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 속에는 항상 다툼이 있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과 경건의 생활을 할려고 할 때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올 것이 염려가 되지만은 염려하지 말라고 마태복음 10장 30절로 너희는 염려하지 말아라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헤아리고 있다. 너의 생명을 허락하기 전에는 예정에 예정된 대로 죽을 때가 아니고는 내 생명을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예정에 없는 어떤 것으로 물질을 빼앗아 갈 수도 없고 예정에 없는 건강을 빼앗아 갈 자도 없다. 예정에 없는 생명을 빼앗아 갈 자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내게 있는 이것을 가지고 빼앗길까 없어질까 염려하지 말고 우리는 거룩과 경건으로 의을 이루어 가는 데에 전 힘을 다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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