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4월7일 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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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한계시록3장7-13절
23040753(요한계시록 3장 7-13 절)
제목: 열린문을 받는 길
본문: 요한계시록 3장 7-13 절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우리 신앙의 앞길을 아무도 방해할 자가 없고 우리의 신앙의 앞길을 주님이 형통케 하면 아무도 방해할 수가 없다. 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내 신앙의 앞길을 아무도 방해 수 없는 막을 수 없는 그런 형통한 일이 이루어지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것을 여기 열절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내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이름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했다. 이렇게 말씀을 한 것입니다.
 내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 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신구약 성경 말씀을 지키는 것이요. 이름을 배반치 아니했다 하는 것은 주님의 이름은 주님이 하신 모든 이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속하시는 일을 하신 이 대속을 배반치 아니했다.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적은 힘을 가지고 내가 주님이 하신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대속을 입고 벗지 아니했다. 하는 것으로 여기에 말씀을 했습니다. 그 열린 문을 받게 되고 아무도 닫을 수 없는 열린문을 받게 된 이것은 적은 능력을 가지고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했기 때문에 열린 문을 받게 됐다. 하는 것을 여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온 세상을 보면 참 언제 이 세상이 다 절단 날는지 모를 만큼 참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위험하고 어려운 지금 형편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언제 그렇지 않은 때가 없이 언제든지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참 이렇게 위험스러운 언제 전쟁이 일어날 것하고 방금 뭐 절단될 것처럼 이렇게 으르렁 거리고 사는 지금입니다.
주님의 재림의 때가 임박하면 이런 전쟁이나 이런 큰 환란이 많이 일어나고 또 이로 인해서 오늘 믿는 사람이 이 신앙걸음 걸어가다가 시험에 들어서 다 넘어지고 이 구원이 실패가 되는 이런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우리에게는 그런 시험이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시험이 올 때 우리는 어떨 것인가?
지금까지 예수를 믿는다고 이렇게 열심히 했어도 마지막에 환란 때에 그만 이기지 못하고 주님을 부인하고 나면 다 이 구원이 헛일 되고 마는 것 아닌가 여기에 고민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 일제 식민지 시대에도 큰 환란에 고통이 오니까 다 넘어져 버리고 참 믿는 사람은 몇이 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말씀을 지켜 산 사람은 몇 되지 않았습니다.
6.25 때도 그래했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닥쳐올 이런 환란이 생길 때는 우리는 어떨 것인가? 우리도 별수 없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여기에 대해서 고민하고 준비할 수 있는 그런 우리가 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생각지 않고 갑자기 우리에게 닥쳐오는 큰 환란이 임하고 만다면 이 환란 넘어서는 큰 보배로운 구원이 있지마는 당장에 어려우니까 그만 다 패전하고 마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말 것을 생각하니까  기가 찰 일입니다.
그래도 여기에 열린문을 받으면 열린문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런 일이 있어도 아무 상관없이 신앙 생활하는 데에 중단되지 않고 막히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이 구원을 이루어 갈 수 있게 되겠는데 내 앞에 열린문을 두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열린 문을 받고 어떤 사람은 열린 문을 받지를 못하느냐 그 열린문을 받은 사람은 능히 닫를 사람이 없어 없다.
그러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내가 내 행위를 아노니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했다.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신앙 경험을 통해서 능력이 있는 사람이나 힘이 없는 사람이나 주님이 주시는 이 건설 구원 이루는 것은 같습니다.
공부 많이 하고 연단받은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유식한 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구원 이루는 데는 꼭 같은 입장이라 하는 것입니다. 저 목사님이야 항상 성경 보고 기도하고, 그리 하니까 그건 잘 이루겠지 우리 같은 사람이야 많이 이룰 수 있겠는가 목사님이 이루는 것이나 여러분이 이루는 것이나 구원은 건설 구원을 이루는 것은 다 꼭 같습니다.
저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하고 똑똑하고 그러니까 구원을 잘 이룰 수 있지만 우리같이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그런 구원을 이루겠는가?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능력이 많은 사람도 능력이 적은 사람도 힘이 많은 사람도 힘이 적은 사람도 건설 구원을 이루는 데는 다 꼭 갔습니다. 꼭 같은 그 현실을 주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기에게 있는 힘을 다 기울여야 건설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그런 현실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야 얼마든지 예수 잘 믿을 수 있지마는 나 같은 이런 입장에 놓여있는 사람은 어쩔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야 나와 같이 이렇지 않으니까. 얼마든지 신앙 생활 잘할 수 있지만 내가 이런 입장에 놓여있는데, 내가 어떻게 신앙 걸음 바로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 적은 힘 가지고도 적은 힘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했다. 그러기 때문에 열린 문을 줬다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잘난 자나 못난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실력 있는 자나 없는 자나 건강한 자나 병든 자나 꼭 같이 현실을 가지고 하나님이 조절하시기 때문에 조절하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능력이 있고 없는 것의 상관이 없습니다. 능력이 많으면 많은 만큼 지키기 어려운 현실을 주고 적으면 적은만치 지킬 수 어려운 그른 현실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어떤 현실을 줬던지 자기가 힘만 다 드리면,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적은 힘을 받은 사람도 자기 있는 힘을 다 드리면, 주님 말씀을 지킬 수 있고 주님의 대속에 공노를 벗지 않고 잊고 살 수 있고 많은 힘을 가진 사람도 적은 힘을 가진 사람은 어래히 지키기가 어렵지만 그 사람도 다 지킬 수 있는데, 힘이 많으니까.
얼마든지 대속의 공로를 벗지 않고 살 수 있고 또 주님 말씀을 지키고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지만 하는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힘이 많은 것도 적은 것도 실력이 있게 된 것도 얻게 된 것도 부요하게 된 것도 가난하게 된 것도 다 주님이 그렇게 주신이 현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달란트 비유를 보면 닷냥을 받아 가진 사람이 있고 두냥을 받아가는 사람이 있고 한냥을 받아 가진 사람이 있는데, 가서 장사를 해서 이를 남기라고 했을 때에 닷냥을 가진 사람은 닷냥을 남기니까 칭찬을 받았습니다. 두냥을 받은 사람도 두 냥을 가지고 두 냥을 남기니까 칭찬을 받았습니다.
닷냥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장사해서 이를 남기지 않아도 두냥을 받은 사람이 있는 힘을 다 기울여 두 냥을 더 남겨서 내냥이 돼도 닷냥 받은 것 사람보다는 적습니다. 그래도 닷냥 받아 가지고. 칭찬 받은 것이나 두 냥을 받아 가지고. 장사해서 이를 남겨서 칭찬한 칭찬 받는 것이 꼭 같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은 선천적으로나 후천적으로 많게 되고 적게 된 것은 주님이 그렇게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교인이 적도록도 해주셨고 교인이 많도록도 해주셨고 가난하게 살게도 만들었고 부유하게 살게도 만들었고 건강하게 살도록 또 만들고 병들어 병든 몸으로 살도록 또 만든 것은 주님이 그렇게 현실을 가지고 조절해 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진 자라도 자기에게 있는 힘을 다 기울여야 말씀을 지킬 수 있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을 수 있고 적게 받은 자도 자기를 다 기울여야 주님 말씀을 지킬 수 있고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부자나 가난한 자나 구원 이루는 데는 꼭 같은데, 부한 자는 좀 위험합니다. 위험한 것은 많이 있으니까.
이만큼 있는데, 하고 교만하기 쉽고 이만큼 있으니까.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 하고 쉽게 깨을하기 때문에 그만 다 기울이지 못하는 다 기울일 수 없는 이런 사람이 되기가 쉽단 말이오 이러니까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기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렇게 말씀을 한 것입니다.
또 가난한 자는 이것 가지면 뭘 되겠냐 내가 아무리 해도 할 수가 없는데 하고 낙망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한 낙망하지 않고 자기가 자기에게 있는 힘을 다 기울여 한다고 해도 얼마 되지 안 하지만은 다 기울이기야 쉽습니다. 나는 아무리 다 기울여도 얼마 되지 않는데 그러니까 내가 다 기울여야 되겠다. 다문 힘을 써야 되겠다.
이렇게 적기 때문에 자기는 다 기울일 수 있는 이런 자기가 되기가 쉽다 말이요 그래서 부자가 구원을 건설 구원을 이루기가 어렵고 가난한 자가 이 구원을 이루기가 쉽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이 건설 구원을 이루어 갈려고 하면, 자기에 있는 것을 다 기울이지 아니하면 열린문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기울일 때 신앙 생활이 형통하게 됩니다.
그 신앙 생활 하는 것을 아무도 방해할 자가 없지요 과거에 일제시대에 다 기울인 사람은 일본에서 그렇게 박해해도 그것이 상관없이 자기는 능히 다 지켰습니다. 다 지키고 갔습니다. 또 다 기울인 사람은 여기에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내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선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는 말씀은 자기가 이런 형편 저런 형편을 만나도 그런 형편에서 부하기 때문에 많기 때문에 안심하고 게을하지 아니하고 적기 때문에 낙망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다 기울여 사는 이것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는 그것을 두고 나의 인내 말씀을 지켰은 적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켜 사는 그것이 나는 어려워서 이건 이런 입장이 되면 뭐 다 어기고 살지 안 어기고 살 수가 있겠나 어렵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하지마는 다른 사람도 똑같습니다. 그러기에 자기에게 이런 어려움이 닥치든지 저런 어려움이 닥치든지 간에 자기가 자기에게 있는 힘을 다 기울여 살기만 하면 다 이길 수 있게 되는 건설구원을 잘 이루어 줄 수 있게 된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 내가 어떤 형편이 되었어도 말씀을 계속 지키는 내가 되어지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한다. 하는 말은 시험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시험을 만나도 시험이 시험 되지 아니하고 그게 하나도 어려움이 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백 목사님은 신사참배의 어려움도 6.25의 어려움도 평상시와 꼭 같이 그저 주일 지키고 교회 가서 예배드리고 말씀 듣고 기도하고, 늘 그렇게만 사는 거야. 항상 자기를 다 들여서 지켜 살던 습관이 들어서 그대로 이렇게 사니까 그들에게 그 환란이 왔지마는 환란이 자기에게 환란이 되지 않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우리에게 닥쳐올 무서운 환란 이런 시험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인데 어떻게 해야 이길 수가 있겠는가 자 그래서 어떤 사람은 목사님 나는 도무지 마지막 그런 환란이 올 때에 나 그래도 예수 믿겠습니다. 죽어도 예수 믿겠습니다. 그래 말은 못하겠습니다. 그럴 만한 내가 용기가 없습니다. 이거 어찌 해야 되겠습니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봤습니다.
너만 그런 게 아니라, 나도 그렇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그런 때에 환란이 없는 때에 오일을 교회 가서 예배를 드려야 된다. 하니까 뭐 어려움이 없어요. 예배드리는데 뭐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냥 와서 예배를 드리는데도 자기가 다 기울입니다. 다 기울 오늘은 5일 예배 시간이니까. 시간 전에 빨리 딱 가서 예배를 드려야 되겠다.
집에서 벌써 준비를 하고 그 먼저 갈 수 있도록 시간도 맞추어 가고 가서 말씀을 어떻게 잘 듣기 위해서 졸지않고 듣도록 이렇게 준비해야 되겠다. 자기가 준비하는 것을 다 기울입니다. 기울이는 그런 사람이 되면 사람은 그런 환난이 와도 전에 다 기울인 것처럼 고렇게 다 기울여 가는 그런 걸음만 걸어가면 그게 시험이 되는 게 아니라, 고때 곧 어려움이나 똑같은 어려움이 되지 이길 수 없는 그런 어려움이 되지 않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까. 내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 오늘 뭐 그저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게 무슨 굉장한 힘을 들였습니까? 그런 건 아니란 말이죠.
그거는 뭐 그렇게 힘을 많이 안 들여도 자기가 자기에게 있는 힘은 얼마 없는 아주 적은 힘만 가지고도 자기가 이 적은 힘이 이 가지고 뭐 되겠나 그냥 마 되는 대로 하지 그래 안 하고 고것도 다 들여서 고렇게 지키려고 하는 애를 쓰는 그런 자기가 되어져 갑니다.
그게 적은 힘을 가지고도 자기가 주님 말씀을 지키는 거 예수님의 대속을 입고 벗지 않고 사는 그 걸음을 자기가 다 드리 지킨 다 들여 지키면 거기에서 내가 시험에 걸리지 않게 된다. 시험에 낙제하지 않게 된다. 시험에 다 합격하게 된다.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앞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앞에 닥쳐오는 그 시험은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가하는 자들 시험하는 때다 그래 이 세상에서 시험을 치는 것이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시험을 친다 너만 어려운 게 아니다. 너만 그런 시험이 어렵고 힘들고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똑같다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 시험할 때라 이러니까 우리는 자기에게 있는 적은 힘을 다 기울여서 다 기울여서 지키는 요것이 될 때에 우리는 시험을 이길 수 있다.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현실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 예수님의 대속의 공노를 입고 사느냐 입고 살지 않느냐 지금은 집에서 쉬는 시간인데 쉬는 시간에도 네가 말씀을 지키느냐 거 쉬는 시간인 인데도 내가 대속의 공로를 입고 벗지 않느냐 오전에 이렇게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도 내가 말씀을 지킴으로 일하고 대속의 공로을 입고 벗지 아니함으로 일하고 이 일을 네가 다 들여서 했느냐 다 들여서 그 현실마다 다 들여서 사는 자기가 되면 우리는 네 개 닥쳐오는 모든 시험을 다 이길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부터 잘 지키겠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내일은 내일 지키고 오늘 요 시간에 지킬 거 요 시간에 내가 해야 될 거 내가 다 기울여 지키는 자기가 되면 내일도 오늘의 현실이 되면 내가 다 기울여 지켜 또 자기에게 현실이 찾아오면 자기가 있는 힘을 다 기울여 지키고 그러면 일생을 우리는 다 시험을 통과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우리 현실의 현실에서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의 대속을 벗지 않고 지나가면 그 현실에 소속한 마음의 기능과 몸의 기능이 시험을 통과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만난 그 현실은 내게 속한 마음의 기능과 몸의 기능이 영멸이 되느냐 영생이 되느냐 하는 이것이 그 현실 현실에서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기 현실에서 자기의 심신의 기능을 영생 하도록 이렇게 구원을 얻도록 하지 못하면 우리는 기능을 가지고 세상을 삽니다. 이 세상도 자기의 심신의 기능을 가지고 살고 영원 무궁해 세계도 심신의 기능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자기의 기능을 마음의 이런 기능과 몸의 기능을 가지고 얼마나 마음의 기능이 몸의 기능이 구비되어 있는지 기능을 따라서 가치와 대우와 환영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죄 짓는 기능은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죄 없는 기능을 가지고 가지 죄 있는 기능을 가지고 가지는 못합니다.
죄 없는 기능을 가지고 의로운 기능을 가지고 하나님과 하나 되어 사는 이 기능을 가지고 사는 세계가 영원 무궁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을 심판하는고 하면, 그 죄 짓는 기능을 다 골라내어서 죄짓는 기능을 멸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인 것입니다.
오늘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자기는 이런 기능이 있고 저런 기능이 있어서 기능 가지고 살고 먹고 수입하고 대우받고 이렇게 사니까 잘하는 것 같지만 기능이 죄 짓는 기능이었으면 죽고 죽어서 완전히 죽는 기능이 되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기능이 완전히 죽어버리는 둘째, 사망으로 기능이 영멸 되어지는 기능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잠깐 있다가 지나가는 세상이지만 자기 심신의 기능을 영멸 시켜 버리고 나면 영원히 우리는 가치 없는 자가 되고 맙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오늘 잠깐 지나가는 현실을 자기의 심신의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기능으로 자기의 심신의 기능을 예수님의 대속을 입고 통과하는 기능으로 이렇게 만들어가면 여기에서 우리는 영생을 이룰 수 있는 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영원히 가치와 영광과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이런 우리가 됩니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자기 있는 힘을 다 기울여서 주님 말씀을 지키고 주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벗지 않는 사람이 되면 이것으로 우리는 열린 문을 받아서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이 깊이로 우리는 들어가서 누릴 수 있는 이런 것을 우리는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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