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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6월25일 주전 신앙양심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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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베드로전서3장 20절-22절
23062501(베드로전서 3장 20-22절)
제목: 신앙 양심을 길러 가야 하는 것은
본문: 베드로전서 3장 20-22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알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8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편이 곧 세례라 육체에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우리 사람이 세상을 살 때 이런 저런 활동하는 모든 활동은 물질을 얻기 위해서 합니다. 세상에서 이 일 저 일을 하는데 어떻게 하면 돈을 좀 잘 벌 수 있을까? 하고 돈을 벌 수 있는 그런 길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돈도 좀 벌고 좀 더 장성해지고 나면 이제 그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옳은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그런 옳은 행위를 하는 이런 사람이 되어질려고 애를 써갑니다. 그러다가 좀 더 이제 장성한 사람이 되면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사람들이 자기를 지지하고 자기를 옳다고 이렇게 생각하고 이런 자기가 되어지려고 사람들은 세상에서 이렇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렇게 살려고 할 때 어떤 방편으로 이렇게 사람이 이 길을 성공해 볼려고 이런 목표를 성공해 볼려고 애를 써 가는고 하니 예 과학적인 세상 지식적으로 과학적인 그런 이치에 맞추어서 살려고 애를 써 갑니다. 세상 과학적으로 인간 그 물질의 그런 이치를 따라서 이렇게 살려고 할 때 그때는 물질 수입이 됩니다.
세상에서 물질 성공할려고 하는 데는 그 물질의 논리를 따라서 그렇게 사니까 그것이 이루어져 가지 그러나 물질과 인간과는 화합이 잘 안 됩니다. 물질과 물질은 화합이 되지만은 이것이 화합이 잘 안 되기 때문에  실제로 사람을 얻어야 되겠다. 하는 데서는 도리어 실패가 되고 맙니다.
세상 물리에 맞춰서 물질적으로 이렇게 해서 돈은 많이 모았지만은 결국에 사람을 잃어버리면 마 그만 사람과는 대립이 되고, 멀어져 버리고 마는 그런 사람이 되어지고 말지요 그러니까 나이가 좀 들어서는 이제 내가 사람 노릇을 좀 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사람 노릇 할라고 애를 써 갑니다.
그래서 사람과 좀 이 사람이 나를 지지도 하고, 나와 하나가 되어서 움직여 갈 수 있는 이런 사람이 되어서 가면 참 세상 사는 것도 이렇게 행복되게 이렇게 살 수 있는 그게 됩니다. 여러분 나이가 좀 들어서 가만 보면 이게 실패가 되니까. 그 사람에게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없어요.
나이 많아가니까 혼자 외로워서 혼자 말이요 아무도 찾아가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괜히 왜 나는 사람이 찾아오지 않느냐 외롭다 뭐 어떻다 온갖 말하든 자기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래 산 결과로 그렇게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사람을 얻는 방법이 뭐냐 그것이 제일 좋은 방법으로는 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양심으로 사는 것 온천하에 있는 사람의 양심이라는 것은 하나입니다. 하나라는 말은 한 양심이라는 것보다 양심은 제일 옳고 바르고 깨끗하고 제일 바른 그곳을 찾아가고자 하는 요것이 양심이란 말인 거죠.
이건 다 똑같다 이거요 양심이라는 것은 다 똑같다 그래 자기가 그 내가 제일 옳고 바르게 살아야 되겠다. 내가 제일 깨끗하게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사는 그 길 여기에서 사람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그런 길을 걸어가면 성공이 되느냐 양심은 하나라 모든 사람의 양심은 다 자기대로는 옳고 바른 것을 찾아갈려고 깨끗한 것을 찾아갈려고 하는 것이 다
꼭 같지만은 양심이 다 같은 지식으로 된 양심은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지식에 따라 향방이 다른 그런 양심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체 사상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보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이북 정권이 잘 되는 것을 바라고 유지되기를 바라고 그거 위해서만 하는 것이 자기가 제일 옳고 바르게 하는 줄로 그렇게 정의롭게 사는 것인 줄로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이런 사람이 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죠.
다른 사람은 너 왜 그래 왔나 그거 틀렸다 그래도 자기로서는 제 길이 제일 옳고 바르게 느껴져갑니다. 또 자유민주주의에 사상을 가진 그런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면, 여기에 맞지 않는 공산주의의 그런 지식을 가진 사람이 말을 하면 그건 틀렸다 절대 그거 그건 동의하지 않아죠 또 불교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 양심대로 살려고 할 때는 아무 욕심을 가지질 말아라 욕심을 다 내놓 내려놓고 이렇게 살면 부처가 된다.
그래 마음을 가지고 다 그렇게 할려고 애를 써가지요 그러나 기독교에서 볼 때는 그게 아니란 말이요 이러니까 또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은 이슬람교 믿는 사람으로서 그 양심대로 제일 옳고 바르다는 것을 따라 사는 것이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양심은 어떤 지식을 가졌느냐 지식에 따라서 향방은 다릅니다.
향방은 다르지만은 그 지식대로는 제일 옳고 바르게 살려고 애를 써 가는 그것이 양심대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불교의 양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되면 불교의 지식을 가진 어느 나라 어떤 곳에 있는 사람이라도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있어요. 같이 느끼는 거야.
같이 느끼고 이렇게 자기가 양심대로 살려고 할 때 불교의 지식을 가진 사람은 불교의 양심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모든 사람들과 하나가 되고 이슬람교 믿는 사람은 이슬람교 믿는 사람끼리 하나가 되고 민주주의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민주주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과 하나가 되고 그 종류대로의 양심과 한 깨달음 한소원 한 방향으로 이렇게 사는 사람이 다 되어지고 맙니다.
그것은 자기의 사상과 주의와 본질과 본성이 같기 때문에 같은 종류의 그런 사람이 되어버리고 같은 종류의 사람끼리 대변에 하나가 되어 저 버리고 맙니다.
그래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똘똘 뭉쳐서 그렇게 움직이는가? 그 참 이해가 잘 안 갈 때가 많지요 그 원인은 같은 사상 같은 마음이라 말입니다. 똑같은 사상 같은 주위 같은 본질과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 때에 처음은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 데는 어떻게 하면 돈을 좀 많이 벌 수 있을까? 돈을 버는 데에 거기에 마음을 기울여서 이렇게 삽니다. 그렇게 살려고 할 때는  물질의 법칙을 따라가지고 물리를 따라서 그렇게 움직이니까. 돈벌이가 잘 되어 갑니다.
그래 돈은 자기가 벌었지만은 이 사람들과의 사귀는 것은 아이 그래도 뭐 이 사람과 나와 하나다 이렇게 해도 껍데기는 말이요. 하나가 된 것처럼 이렇게 하지만은 속속들이 보면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 껍데기는 그냥 같은 것처럼 또 서로 좋아하는 것처럼 이렇게 해도 그 속은 딴 사람이 되어 있어요. 딴 사람이 그러니까 사람을 차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차지하는 그런 길이 뭐냐 이 세상에서 그래도 자기가 사람으로서의 행동을 하는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그래도 좀 되겠는데 그러니까 어릴 적은 돈을 버는 데 주력을 하지만은 돈을 좀 버린 사람으로서는 그래도 사람 구실을 해야 된다. 게 이 사람과 인인 관계를 바로 가지고 사람과 일인 관계를 바로 가지고 그렇게 할려고 애를 쓰고 이제 그보다는 뒤에는 그 모든 삶을 차지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모든 사람이 나를 지지하고 좋아하고 높이고 나와 하나가 되어질 수 있는 그 길이 뭔가 이게 인생으로서 세상에 사는 데 제일 큰 성공이 되겠습니다.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돈은 있는데, 삶을 생각지 않고 사니까 모든 사람과 원수가 되어서 사람 사는 생활이 참 어렵습니다. 고통을 많이 당해요. 그래도 자기는 사람 노릇을 한다고 이렇게 이 사람에게 그래도 물질을 좀 도와주고 위해도 주고 인인관계를 바로 가질라고 이렇게 애를 써 갑니다.
그러면 껍데기는 허허 하고 웃으면서 같은 편인척하고 같이 하나가 된 것처럼 이렇게 하지마는 속은 다르단 말이에요. 어떤 어느 날 하루 딱 보면 나와 같은 줄 알았는데 사람이 물질을 얻기 위해서 허허 했구나 나에게 이런 정보를 얻기 위해서 허허 하고 했구나 나와는 하나가 아니다. 게 그것을 이렇게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또 나하고 하나가 된 사람이 참 온다 참 외로운 인생길이다.
여기서 참 여러 사람과 같이 어울러서 사는 행복된 그런 길이 무엇일까? 그래 찾아보면 하면서 아무리 해도 사람을 차지하질 못하는 그래 사람을 차지하는 것은 양심을 가지고 양심으로 살 때 사람을 차지하게 됩니다.
 암만 그래도 사람은 이렇게 상대할 때 저 사람이 제일 깨끗한 사람이야 그래도 사람이 제일 좋은 사람이야  사람이 사람을 인정하고 알아주고 실제 자기에게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사람에게 가서 의논하고 그렇지 않음과 이렇게 대화를 하면서 여러 가지 마음의 문제도 풀어보려고 애를 써가는  사람과 만나서 한참 얘기하고 나니까 마음이 풀리고 그래도 내 마음과 같은 이런 사람이 딱 느껴서 좋아하고 이렇게 되어도 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얻는 이 성공은 양심으로 사는 이것이 제일 사람을 얻는 데에 수입이 많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기독자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 기독자로서의 제일 수입 많은 걸음을 걸어갈 수가 있느냐 기독자가 기독자의 양심을 가지고 기독자의 양심은 신앙 양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되면 금방 그만 동류가 되어져 버리고 맙니다 다 같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기독자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이 지식으로 자기 지식을 삼고 이 지식으로 자기가 제일 옳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지면은 이런 신앙 양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는 오늘 처음 만났는데도 아주 오래된 만남의 사람처럼 그렇게 가까워지고 그만 이 형제처럼 이렇게 지내게 되는 그런 일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데 이 신앙 양심을 가진 사람은 천명이고 만 명이고 동료의 사람이 되어지지만은 이런 신앙 양심을 가지지 못하고 신앙 양심을 죽인 그런 사람이라고 하면, 예수 믿는다고 해도 그 사람은 사람을 얻지 못합니다. 사람을 얻는 이 일은 다 전멸이요. 인인협조라는 것은 다 전멸입니다.
사람과의 친교을 가지는 것도 기독교적인 사회활동이라도 다 진공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양심을 길러놓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또 한 가지 있는 것은 양심을 기르면 기독교인의 신앙 양심을 잘 기르는 데서 기독교인들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자기가 될 수 있고 이것은 순전히 인간만의 인적인 요소만의 것입니다.
인적인 요소로는 이렇게 된단 말이오 또 우리는 양심을 길러 놓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양심을 길러야 양심이라고 하면,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 성경 말씀의 이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삼고 이 지식대로 제일 깨끗하고 옳고 바르게 살려고 애를 써가는 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기독자의 신앙 양심입니다.
이 양심이 있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양심이 있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양심이 어느 정도 깨끗한 양심을 가졌느냐 이 신앙 양심이 깨끗한 신앙 양심을 가진 것 만큼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구나 이걸 들을 수가 있어요.
또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를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 시간 이것을 하는데 이걸 증거하지만 여러분이 이거 잘 깨닫지를 못하니까 이 참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성공이 되어지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신앙생활이 성공되어지느냐 기독자의 신앙양심을 지키려고 하는 여기에서 이게 된단 말이에요.
 신앙 양심이 있는 사람은 눈이 밝은 사람 이 신앙 양심은 하나님을 찾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빛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면, 이 신앙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 신앙 양심이 자기의 행동과 하나 되어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이 하시면 역사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하나님에게로 가까이 갈 수 있는 자기가 되지 그렇지 않으면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기독자의 신앙 양심이 하나로 되어져 있는 사람이면 기독자로서 다 동류의 행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뭐 자기가 어느 정도 그 양심이 밝으냐 양심이 밝은 것 만큼 밝은 것만큼 그대로 하나 되어 움직여 살 수 있는 자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 사는데  양심으로 이렇게 하는 것보다 더 효과가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설교하는 사람도 이 웅변 학원에 가서 웅변도 배우고 이래서 말을 잘하는 말을 잘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또 책을 읽어보고 여러 가지 수사학을 하고 논리학을 해서 이렇게 말씀을 증거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고 유익을 끼칠 수 있는 그런 설교를 하지 않을까? 해서 사람들은 이 면에 주력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 목소리가 좋더라고. 그 사람처럼 묘한 말을 참 다른 데서 듣지 못한 그런 논리의 그런 지식이 거기에 있더라고. 이렇게 사람들이 찾아오지만은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효력이 있는 것은 신앙 양심이 깨끗해서 깨끗한 양심으로 설교하는 것 이것보다 더 좋은 길이 없습니다.
다 이걸 원하기 때문에 양심이 깨끗한 양심으로 증거하면 그 마음이 동감이 되어집니다. 그 깨달음이 하나가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래서 자기와 행동할 때에 양식으로 사는 그것은 인적 요소로서 최고 고차원적인 최고 고차원적인 제일 성공되어져 가는 그런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이 신앙 양심을 길러야 돼요. 그래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를 볼 수 있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그런 우리가 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양심으로 사는 여기에 나아가야 하고 그 양심으로 사는 것은 신앙 양심을 죽이지 아니하고 그 신앙 양심을 북돋우고 그 신앙 양심을 길러가게 하고 신앙 양심을 장성하게 해야 합니다.
이러니까 사도바울은 이 신앙 양심을 장성하게 하니까 장성한 신앙 양심은 자기가 순교할 수밖에 없는 자리지만은 자기의 생명을 끌고 그 자리에까지 끌고 나갈 수 있는 요 양심이 장성한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양심을 자꾸 길러가야 됩니다. 양심을 죽이지 말아야 됩니다. 양심을 죽이고 힘을 빼게 하는 것은 자기 속에 신앙 양심이 이래야 옳습니다.
그래 말해도 그걸 무시해 버립니다. 자기 욕심이 양심을 눌러버리고 자기의 배짱이 성질이 양심을 눌러버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이 되면 그 양심을 죽여버리는 것이 됩니다. 양심이 자기에게 이렇게 해야 된다. 할 때 맞다. 그게 없다. 그래 보자 이렇게 하는 것은 양심을 북돋는 일이 됩니다. 어떤 반대나 어려움이 있어도 양심으로 하자는 여기에서 양심이 장성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심이 장성해 가는 여기에서 이 양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알려주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기가 된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어떻게 하라고 하시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이지 이것을 알 수 있는 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가 신앙 양심이 장성해져 가면 지금은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려고 하는구나 이것이 보인다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는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신앙 양심이 장성해 간 사람에게는 진리의 역사가 깨달아지게 되어지죠 그래서 진리를 따라 사는 자기가 되어집니다. 이 진리는 무엇이 진리냐 진리는 자기 현실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알려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기 현실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알려주는 그 뜻은 진리라 자기가 언제든지 뜻대로 사는 자기가 되어지면 어떻게 되어지느냐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시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영감으로 역사하시고 그 영감이 진리로 역사해서 1차 창조를 하시고 재창조를 하시고 이제는 이 차 창조를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역사하고 있는 것이 이 진리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기가 양심을 써서 양심대로 살려고 할 때에 양심을 북돋우고 양심을 길러가고 양심을 자라게 해서 이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이 자기 현실에서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려고 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서 나도 그렇게 살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서 우리에게서 전능의 역사가 전지전능의 역사가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전지가 되고 전능이 되고, 완전히 될 수 있느냐 할 수가 없지요 유한한 인생이 어떻게 그렇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것을 자기가 알았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을 들었고 하나님 따라서 동하고 정하니까 자기가 그렇게 했지만은 그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은 주님이 하시는 것이 됩니다. 이러니까 자기는 일을 전지로 전능으로 그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회사에 가서 일을 하는데도 양심으로 살려고 해야 됩니다. 양심으로 일을 하려고 합니다.
양심을 기울여서 살려고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에게 너 이렇게 해라 이것은 하지 말아라 요길을 가라 하나님이 자기에게 그 일을 어떻게 할 것을 알려주는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고 그것을 따라가면 우리는 여기에서 진리를 만나고 진리를 따라가니까 진리가 나를 붙들고 역사해서 이 일을 완성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이 차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이 차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처음 자존하시고 자존하신 하나님이 처음 역사하실 때에 영감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영감으로 역사했는데 영감의 역사가 진리로 역사한 것입니다. 진리는 1차 창조 아무것도 없는 데서 변질될 수 있는 죽을 수 있고 변해질 수 있는 이 모든 것을 다 창조한 것입니다.
또 창조한 것을 가지고 다시 재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창조의 역사로 영계도 만들어졌고 물질계도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사활대속공로를 완성하고 난 이후에는 영감이 역사할 때에 진리로 역사하는 것이 2차 창조를 하는 역사를 합니다. 이 차 창조는 완전자를 창조하는 요 역사입니다.
나를 통해서 완전을 창조하는 역사를 하니까 이제 우리는 인생으로서 이런 성공을 하는 데는 최고의 성공은 나는 유한하고 보잘 것 없는 내지만은 주님에게 완전히 붙들려서 주에 것되어서 사용되어지니까. 우리에게는 굉장한 능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이 칼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면 칼은 사람을 죽이는 강도의 칼이 되지만은 그 사람이 칼을 가지고 조각을 아주 좋은 조각을 만들어내니까 그 칼은 조각가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것이고. 이 칼 가지고 요렇게 만들어 이 칼을 가지고 이런 종합가를 만들었다 그렇게 칼을 귀중이 여길 수 있게 되겠지요.
그와 같이 우리는 주님에게 완전히 붙들려서 주님으로 인하여 움직여지는 자기가 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이 차 창조가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목표로 이렇게 신앙걸음을 걷도록 이 걸음을 걸어서 성공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힘을 기울여 가야 할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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