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 설교 입니다 재독으로 많은 은혜 받도록 합시다. 

2023년6월18일 주전 신앙양심을 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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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3061801(베드로 전서 3장 21-22절)
제목: 양심을 기르자
본문: 베드로 전서 3장 21-22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마태복음 5장 8절에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다.  했고 또 요한 일서 3장 21절 이하로 보면 누구든지 마음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대로 다 얻는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이 깨끗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이고.
마음에 자책할 것이 없는 이런 우리로 이렇게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성공의 걸음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본문의 말씀은 세례를 받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면 세례 의식을 행할 때 물속에 잠겼다가 나오는 침례식으로 받는 것도 있고 물을 찍어 뿌려서 받는 그런 세례식도 있습니다. 물을 뿌리는 것이나 잠기는 그것은 우리가 양의 피로 속죄를 받는 것을 가리켜 말 말하는 것이고.
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로 속죄받는 것을  표로 해서 이 세례를 을 주는 것입니다. 세례를 주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서 새 사람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그것을 두고 이 세례 의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를 받는 데는 우리가 육체에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으로 물로 세례받는 것이 아니고 그 세례를 받는 중심은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이 의식을 베푸는 것이 세례 받는 것이다.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시대에는 할례라 해가지고 육체에 더러운 것을 제하는 것으로 이렇게 했지마는 신약 시대에는 물로 세례받는 이것으로 나타냈습니다.
세례받는 이것이 육체 더러운 것을 제하는 그런 의식이 아니고 우리의  삐뚤어져 있던 모든 것을 이제 다 제함을 받고 깨끗한 자기가 되어서 하나님을 향해서 찾아가는 하나님과 가까워져 가는 이 시작 이것이 이제 시작이 됐다. 지금부터는 이제 하나님과 점점 가까워져 갈 수 있다. 가까워져 갈 수 있는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받는 행위는 착한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찾아가는 그것이 세례받은 자로서의 그런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세례받은 자로서 우리의 행위는 착한 양심으로 살아서 하나님에게로 찾아가는 하나님과 점점 가까워져 가는 그런 걸음을 우리가 걸어가야 되는데 그렇게 걸어가는 데는 이 양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여기에 대한 깨달음을 우리가 바로 가지고 이렇게 살아야 되기 때문에 이 양심에 대해서 오늘은 좀 배우겠습니다.
양심에 대해서 양심이 뭐냐 하는 양심의 정의를 바로 다 하고 있지를 못합니다. 그래 그저 양심은 마음 가운데 착한 마음이 양심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양심은 사람에게 속한 요소가 아니고 하나님에게 에 속한 요소도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자로 되어 있는 이것이 양심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양심은 사람에게 잘못된 것을 하나님에게 고소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을 전달해 주는 이것이 양심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또 많이 있습니다.
양심은 인적인 요소가 아니고 신적 요소도 아닌 그런 요소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은 양심은 인간에게 있는 인적 요소지 그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그런 요소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은 어떤 것이 양심이냐 양심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하는 것은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서 제일 이상 없는 최고의 그것을 찾아가는 요것이 양심인 것입니다.  양심은 사람이 알고 있는 지식대로 요것이 제일 옳고 바른 것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대로 최고의 고 이치  고것을 찾아가려고 하는 그것이 양심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불교 믿는 사람의 양심이 있고 유교 믿는 사람의 양심이 있고 또 주체 사상을 가진 사람의 양심이 있고 민주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의 양심이 있고 자본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의 양심이 있고 이 사람이 다 다른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지식대로 이게 제일 옳고 바른 길이라 그래서 불교 믿는 사람으로서 참선을 하고 뭐 마음의 욕심을 다 내려 놓고 마음이 완전히 비워지는 그런 연습을 한다고 이렇게  하고 있지요 또 유교적으로는 도덕적인 그것을 다 가지려고 애를 쓰고 고것을 가지면 제일 바로 사는 것으로 알고 이렇게 합니다.
또 주체 사상을 가진 사람들 보니까, 지금도 뭐 나라가 망하든지 말든지 백성들이 굶던지 어쩌든지 간에 이북의 정권만 잘 유지되면 옳다 이렇게 또 주장하고 그 일을 위해서 힘을 쓰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지식을 어떤 지식을 가졌느냐 그 지식을 따라서 자기 양심에 이것이 제일이다. 제일 옳고 바른 최고의 깨끗을 찾아가는 것이다.
해서 그대로의 사람으로 살려고 애를 써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신앙생활은 신앙양심을 기울여 살아야 합니다. 신앙 양심을 기울여 살아야 신앙 양심에 인도를 따라가는 그런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을 만나고 점점 깨끗한 자기로 자라갈 수 있게 되어집니다.
그러면 이 신앙 양심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피로 대속함을 입은 사람의 마음이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의 이 지식을 힘입어서 영감을 따라서 하나님을 향해서 찾아가는 이것이 신앙 양심인데 요. 신앙 양심은 산 양심이요. 이 양심 외에 수많은 양심들은 다 죽은 양심이다. 신앙 양심만 산 양심이요.
그 외에 양심은 그 양심이 주장하는 대로 이게 옳다 이게 최고다 제일 깨끗이다. 하고 가지마는 그것은 다 죽은 것이다. 죽은 것이다. 신앙 양심만이 제일 깨끗이요. 옳은 것이다. 산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판정을 합니다. 어째서 그러면 다른 양심은 무조건 정죄하고 신앙양심만 산 것이다. 옳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가?
세상에서는 다 자기대로의 자기에게 맞추어서 그게 맞으면 옳다 이렇게 말하지마는 온 세상은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시고 예정하시고 창조하시고 주권 섭리로 역사하는 세상이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루어진 이런 세상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목적을 향하여 바로 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그 길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 신구약 성경 지식이니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하나님이 짓지 않는 짖지 않은 존재가 없고 모두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들이요. 하나님이 주권 섭리로 움직이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움직이는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움직여지는 이것이 제일 옳고 바른 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요. 지식대로 옳고 바른 것을 찾아가려고 하는 요것이 제일 바른 양심이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양심이 있는데, 악령에 속한 양심 세상 지식에 속한 이 양심을 가지고 과거는 우리가 살았던 우리들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고는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가 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지식만 정확모오하니 이 지식을 따라 살아야 되겠다. 하는 이것을 우리가 작정하고 이 지식을 따라 살려고 우리가 나섰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양심이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성도들이 성경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삼아서 이 지식을 힘입어 이 지식이 가르치는 가장 옳고 바른 이 길을 걸어서 성령의 감화를 만나려고 영감을 찾아가는 것이 신앙 양심이오 영감을 만나서 영감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을 찾아가는 이것이 신앙양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된 사람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 영감을 찾아가고 진리와 영감을 힘입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것이 신앙 양심의 걸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신앙 양심으로 사는 데는 주의할 것은 양심의 화인을 맡지 않도록 애를 써야 됩니다. 양심의 화인을 맡는다는 말은 양심에 주인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양심이 어떤 것에 소속되었다. 하는 말입니다.
화인이라 하는 말은 불도장을 말합니다. 도장을 쇠로 만들어서 불에 달구어가지고 찍어놓는 그런 것을 말합니다.  도장을 찍는다는 말은 도장을 가진 도장을 찍은 그 사람이 책임을 진단 말입니다. 그러면 양심의 화인을 맞았다.
그러면은 양심의 주인  무엇이 주체가 되어서 이게 옳다 하고 이렇게 끌고 가고 있느냐  세상에 모든 이종교 중에 금욕을 주장하는 그런 종교는 세상에서는 좀 권위 있는 종교로 인정을 받습니다.
세상에서 식욕이나 명예욕이나 공명욕이나 권세욕이나 물욕이나 정욕이나 이 모든 욕심을 절제해서 금욕하는 그런 종교가 세상에서는 좀 진실한 종교라 해서 사람들이 다 좋게 그렇게 평가를 합니다마는 금욕하면 제일 좋다. 이렇게 말하는 거기에 양심이 화인을 맞아가지고.
이렇게 신앙생활하는 종교기 때문에 그 양심은 금욕에 붙들려서 사는 그런 양심입니다.  양심은 어떤 것에도 붙들리면 안 됩니다. 양심은 주인이 없는 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어디에 매여 있지 않는 자유하는 이 양심이라야 산양심이요. 바른 양심입니다.
자기에게 대해서 조금이라도 옹호하는 그런 생각을 가진 양심이라면 자기에게 화인마다는 양심이 되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돈의 화인을 맞아서 그 양심이 돈에 유익이 되어지면 옳다고 돈 위주로 판단하는 그것은 돈의 화인을 맞은 양심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기를 두려워하는 그런 양심이 되어졌으면 죽음의 화인을 맞은 쓸모없는 양심입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이것의 것도 저것의 것도 아니고 아무것에도 소속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남에게나 나에게나 원수에게나 모든 사물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정평정가하는 요 자유권을 가진 양심이 신앙 양심이요. 산 양심입니다.
우리는 양심 생활만 하면 다 되는 줄 이렇게 알지마는 세상에 사람마다 양심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양심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양심이 화인을 맞았기 때문에 쓸모없는 양심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돈의 화인받은 양심을 가졌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일을 해도 돈이 많아지고 커져가면 옳다고 생각하고 그것만 손해 가면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돈의 화인 받은 양심을 가진 자요 이 세상에서 사회주의의 양심을 가진 사람 공산주의의 양심을 가진 사람 자유민주주의의 양심을 가진 사람 다 화인받은 양심 입니다그런 화인받은 양심이 되지 않도록 자유화하는 양심 자유하는 양심은 그런데 하나도 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하는 요 양심이 산 양심이요.
자유하는 양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권자시요 당신의 목적대로 모든 것을 주권 개별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요 양심이 산 양심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양심을 죽이지 아니해야 됩니다. 양심을 죽이지 아니해야 된다.
하는 것은 양심이 이건 틀렸다 이렇게 하는데 양심을 밀어붙여서 틀렸다 해도 그대로 행동하면 양심을 죽여버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양심이 틀렸다고 판정 지었으면 그만 그런 걸음을 걷지 않아야 되는데 틀렸다 해도 양심을 꺾어서 그대로 하면 그 사람의 양심은 죽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을 매장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양심을 매장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양심의 호소를 무시해 버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호소를 무시하는 것은 양심을 매장하는 것이요. 양심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을 우리는 북돋아서 가꾸어 가도록 해야 됩니다. 자기 양심을 자꾸 가꾸지  아니하면 자기는 소경이 되어 지고 맙니다.
내가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는 말은 신구약 성경 말씀을 내 지식으로 삼아서 이 말씀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분별하고 구별해 가도록 이렇게 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데 신구약 성경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사는 신구약 성경 말씀이 제일 옳고 바르다고 알고 인정하는 고 양심을 가꾸지 아니하고 양심을 매장시켜 버리는 자기가 되어지면 점점 자기는 소경이 되어지고 맙니다.
이러나 자기가 양심을 자꾸 가꾸어 가면 자기의 사리 판단이나 가치 평가나 그 사람의 인간론이나 신론이나 사회론이나 이것이 밝아지느냐 소경이 되어지느냐 하는 여기에서 내 양심을 가꾸느냐 매장시키느냐 하는 데 따라 달라져 가게 됩니다. 자기가 양심이 자기에게 알려주면 고 양심을 따라 살려고 애를 쓰는 그것은 양심을 북돋는 것이 됩니다.
무슨 일이든지 물질을 만날 때 이 물질의 이해가 어떻게 되느냐 내 소유가 많아지고 적어지느냐 내 처세가 내 사업인 내 직장이 내가 친밀하게 여기고 있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어찌 되느냐 하는 그런 것은 양심을 무시하고 사는 것이 됩니다.
양심을 북돋우는 것은 물질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사업이 어찌 되든지 간에 직장이 어떻게 되든지 가족이 어떻게 되든지 친구끼리 어떻게 되든지 나는 양심의 인도를 따라가야 되겠다. 양심이 제일 옳다고 알려주는 대로 나는 살겠다. 하는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은 양심을 북돋아 양심을 기르는 사람이 됩니다. 양심을 우리는 북돋고 양심을 기르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양심을 기르는 이것은 양심이 어떤 명령이라도 자기에게 명령할 때에 양심의 명령을 따라가면 자기게 해롭든지 유익이 되든지 양심이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명령을 내리면 단행하는 이것이 양심을 기르는 것입니다.
이제 양심을 길러서 양심이 강건하고 장성한 양심이 되어지면 그 장성한 양심은 어떤 양심인고 하니 자기의 소유에 대해서 양심이 자유자제할 수 있는 그 양심이 장성한 양심입니다. 돈이든지 물질이든지 회사든지  무엇이든지 그것이 자기를 주장하지 못하고 회사가 자기를 주장하지 못하고 가족이 자기를 주장하지 못하고 양심이 소유를 주권했을 때에 양심은 장성한 양심이 됩니다.
장성한 양심은 자기의 몸을 주권하는 양심입니다. 자기 몸이 곤란스러워도 고통스러워도 자기 몸이 감옥에 갇혀서 또 어떤 핍박을 받아도 그 몸을 양심이 주권하고 아무리 힘이 들어도 양심이 이 길이 옳다 이렇게 해야 된다.
할 때 그 양심을 따라가는 양심이 되면 양심은 장성한 양심입니다.  그 양심이 최고로 이렇게 장성한 양심은 어떤 양심이냐 그 양심은 마음을 주권하고 있는 양심이 되면 이제 아주 장성한 양심이 되어집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림에 가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아시아에 있는 성도들이 가지 말라고 이렇게 했지만은 사도 바울의 마음에  내가 양심의 메인 바 되어 양심의 명령을 어길 수 없다. 그 마음에 죽는 길이지만은 그것이 상관없고 양심의 이 길을 가야 된다. 할 때에 죽어도 거기를 가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양심을 가진 사도 바울의 양심은 장성한 양심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 남은 그것은 양심이 생명을 주권하는 양심이면 최고로 장성한 양심입니다. 사람이 생애 애착이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은 양심이 생의 애착심까지 주권 하는 그런 양심이 되었으면 그양심은 아주 장수한 양심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장성한 양심을 향해서 목표를 두고 양심을 자꾸 북돋우고 가꾸어가는 그런 걸음을 우리가 걸어가야 되겠습니다. 양심을 매당하는 일을 하지 말고 양심을 가꾸어 가는 이런 우리가 되어져 가야 됩니다. 이렇게 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마태복음 6장에 말씀하시기를 양심은 마치 우리 몸의 눈과 같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몸에 눈과 같으니까.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둡고 눈이 밝으면 온몸이 밝아진다 지금 여기에 사람이 많이 있어서 눈이 어두워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가 있게 되지만은 아무도 없이 혼자 제가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하면, 함정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러기에 양심은 몸의 등불과 같이 양심은 우리를 옳고 바르게 인도하는 눈이라 등불이라 이 길을 따라갈 때에 이 양심의 인도를 따라갈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을 매장하지 않도록 양심을 죽이지 않도록 양심의 화인맞지 않도록 양심을 북돋우고 양심을 길러야 하고 양심을 장성한 양심이 되어져 가도록 이렇게 할 때 우리 구원이 바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내 소유에 대해서도 양심이 주권하고 내 몸에 대해서도 양심이 주권하고 내 마음에 대해서도 양심이 주권 하고 내 생명에 대해서도 양심이 주권 할 때 그 양심은 하나님으로 더불어 동거동행할 수 있는 그런 구원이 여기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양심을 길러 갈 수 있도록 해 봅시다 양심을 길러가서 양심의 힘이 있을 때 하나님과 나와 하나 되어 사니까 그만 그것은 힘이 없는  것인가?
실패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나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이상 강한 것이 없습니다. 그 이상 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양심의 인도를 따라서  장승한 양심으로 살면 그 사람을 이길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을 키워가는 이런 걸음을 걷는 우리가 되어져 가도록 애를 써 가도록 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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